▲배낭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숙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다. 국적과 종교·인종은 다르지만 찾아보면 공통의 관심사가 적지 않다.
홍성식
역 앞을 벗어나니 인적이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앞장서 걷는 여자를 따라 나 역시 발걸음을 빨리했다. 10분 정도 갔을까. 전단지에 찍힌 숙소 사진과는 전혀 다른 낡고 허름한 건물이 나타났다. 내부는 더 지저분했다. 자주 세탁하지 않은 게 분명한 침대 시트가 때에 절어 반질반질.
약간 실망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잠시. '내처 살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묵고 떠날 건데 뭐 어때'라는 낙관으로 마음을 바꿨다. 한국 시골 여인숙도 1만5000원에는 못 구한다. 그 가격에 뭐 대단한 시설과 서비스를 바라겠는가. 생각을 돌리니 마음도 편해졌다. 내가 숙박부에 이름과 여권번호를 적는 것까지 본 그 '호객꾼 처녀'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다시 역으로 가서 다른 손님을 데려오겠지.
오래되고 깨끗하지 못한 숙소였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스페인에서 온 대학생 10여 명이 단체로 묵고 있었고, 스물넷이라는 호스텔 주인의 친구들도 왁자지껄 모여 스프라이트에 보드카를 섞어 마시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1분 간격으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말하자면, 스페인 청년 절반에 세르비아 청년 절반, 거기에 중년의 동양 사내 하나가 낀 풍경이었다.
나이로 보자면 그들은 내 조카뻘이지만, 서로가 낯선 여행자들에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여배우 페넬로페 크루즈, 세르비아의 테니스 스타 노박 조코비치와 한국의 걸그룹 소녀시대의 이야기가 앞뒤 없이 오가는 가운데 모두가 잠을 잊었다.
그 시끌벅적한 주석에서 나를 숙소까지 데려온 여자가 호스텔 주인의 여자친구란 걸 알게 됐다. 다소 우락부락한 인상의 남자친구를 대신해 상냥한 말투와 호감 가는 인상으로 호스텔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국적도 세르비아가 아닌 에스토니아. 외국까지 와서 연인을 위해 쉽지 않은 호객 일을 자처한 여자. 역시, 사랑은 힘이 세다.
여행을 하다 보면 국적이 다른 커플을 가끔 만난다. 마케도니아에서는 이탈리아 여자와 벨기에 남자 커플을 봤고, 불가리아에선 체코 여대생과 핀란드 사내의 다정다감한 연애를 목격했다. 알바니아에선 독일 남자, 알바니아 여자 커플과 커피를 함께 마셨다.
사랑하는데, 국적 따위가 무슨 제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