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순희 소설 『순비기꽃 언덕에서』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서순희 소설가의『순비기꽃 언덕에서』역시 청소년들을 위한 문학 시리즈 중 하나다.
국은정
최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서순희 소설가의『순비기꽃 언덕에서>역시 청소년들을 위한 문학 시리즈 중 하나다. 도시에서만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갯벌'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눈물겨운 성장기를 진솔하게 담아냄으로써 시골 특유의 정서를 경험한 적이 없는 청소년들에게도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흡입력을 지녔다.
술술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속도감과 함께 '문학'이라는 장르가 가진 무게와 밀도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소금기 가득한 갯마을 사람들의 일상들이 맛깔스러운 사투리와 만나 빚어내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호기심을 빨아들인다.
한승원의 소설이 남해 바닷가의 풍경을 그곳의 언어로 재현해낸 것이라면, 서순희의 소설은 서해 바닷가의 풍경을 그곳의 언어로 구사해 생명력을 얻은 작품이다.
소아마비에 걸린 주인공 봉희는 치료를 받을 시기를 놓쳐 평생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잔인한 운명에 놓이지만, 숨겨진 태생의 비극으로 아픔을 겪고 성장해가는 삼촌과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꿋꿋이 성장해 나간다. 비록 아버지는 불구가 된 딸의 아픔을 외면한 채 어린 딸의 슬픔을 보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상처를 덧나게 할 만큼 매정한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장애아를 둔 가정에서 겪을 수 있는 갈등의 양상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처한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어느 비 오는 날, 우리는 몸을 꼭 붙이고 옴팡집 마루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이 해당화 꽃잎을 때리는 걸 나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경자가, 앙칼지게 소리 질렀다. "비야, 막 쏟아져라! 세상이 다 떠내려가게, 몽땅 망해버리게……!"경자는 연방 무슨 욕설 같은 걸 악써가면서 내뱉었는데, 빗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경자의 그런 행동은, 마치 실성한 것처럼 섬뜩하였다.나는 경자와 나란히 누워 있는 게 싫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 내가 경자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경자를 거북하게 여겼던 일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82p
우리 삶의 부조리들을 애써 포장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려나가는 작가의 필체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숨겨져 있다. 우리의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아름답고 기쁜 일보다 슬프고 힘든 일들이 더 많지 않던가. 그중에서도 문둥병에 걸려 강제로 소록도로 쫓겨 가야 했던 작은할머니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 성장을 마치기도 전에 숨을 거둔 경자의 사연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다.
척박한 모래땅 위에서 모진 바닷바람과 싸우면서도 아름다운 보라색 꽃송이를 피워 올리는 순비기 꽃처럼 봉희 가족들을 둘러싼 수청구지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갈등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이어나간다. 할머니는 꽃을 기르는 것으로, 봉희는 수놓기와 독서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줄여 나갔고, 고모는 공부와 꾸미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것으로 자신에게 대물림 될 가난을 조금이라도 모면하고자 했다.
아버지는 홀로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현실과 맞서보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지금 희망이라고 붙잡은 그 어떤 것에도 불안을 동반하지 않은 것들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