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의 별당인 계정의 모습회재가 정혜사의 승려와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논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부원
그와의 만남은 사후 그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마을 초입 옥산서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보존된 유서 깊은 곳이다. 그를 흠모한 후학들이 남긴 신도비와 현판, 수많은 고문서 등을 접하면서, 아이들은 그의 높은 덕과 학문의 깊이를 깨닫고 회재 이언적이라는 낯선 이름과 친숙해진다.
정문 옆으로 난 외나무다리를 건너 자옥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을 따라 걸어 오르면 그가 7년간 기거한 독락당에 닿는다. 옥산서원이 사후의 역사적 평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곳은 그의 생전 삶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정쟁에 휘말려 관직을 박탈당한 후 낙향해 직접 짓고 살던 집이기 때문이다.
대개 역사는 그가 남긴 저술과 유품 등으로 인물 됨됨이를 평가한다. 하물며 그가 직접 설계한 고택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요즘 말로 하면, 그가 사는 곳이 그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가를 말해준다고나 할까. 건물의 배치와 사용한 부재, 현판 글씨,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을 찬찬히 뜯어보노라면, 그의 학문은 물론 마음속까지도 훔쳐보듯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솟을대문을 지나 옷깃을 여미며 들어간 마당에서 처음 우리 일행을 반기는 건, 귀한 손님을 맞아 절하듯 납작 엎드린 '경청재'다. 현재 회재 선생의 후손이 살고 있는 안채로 연결되는 건물이다. 그 끝엔 출입금지 안내 팻말이 세워져 있다. 사적 공간인 살림집이니만큼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은 대사성과 대사헌, 판서에다 종1품 좌찬성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거친 고관대작의 집답지 않게 의외로 소박하다며 놀라워한다. 이 집의 사랑채인 독락당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 거라며 회재 선생의 성품을 닮은 건물이라고 잔뜩 기대를 부풀려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느 사대부가의 권위적인 사랑채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른 까닭이다.
사랑채라면 높고 화려하게 꾸며 바깥주인의 위엄을 과시하는 게 보통인데, 독락당은 마치 대청마루와 땅이 맞닿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대학 시절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난 답사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아예 땅을 향해 낮게 엎드렸다. 관직에서 쫓겨난 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고집스럽고, 명문 사대부가 지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주눅이 든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