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교 의식이 거행된 장소인 참성단의 모습을 담은 우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우표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김종성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지만, 전우치가 불행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시대가 신선교에 대한 유교의 공세가 최종 국면에 달한 16세기였다는 점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개인적으로 그를 좋아했지만, 정권에 참여한 유학자들은 유교 이외의 것들을 근절할 목적으로 신선교를 탄압했다.
<세조실록> 및 <예종실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이전인 15세기에 조선 정부는 유교의 요구에 따라 신선교와 고조선에 관한 서적을 대거 몰수한 적이 있다. 고조선에 관한 서적까지 금지한 것은 고조선의 국교가 신선교였기 때문이다.
15세기에 뒤이은 16세기에 신선교에 대한 탄압은 최종 국면에 도달했다. 향촌을 유교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규범체계인 향약이 전국 각지에 보급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16세기는 유교가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총공세를 펼친 시대였다.
이런 시대였기에 전우치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그의 도술이 해괴하다는 이유로 체포령을 내렸다.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재령 군수 박광우에게도 "전우치를 붙잡아 두라"는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 편지가 하달됐다.
박광우가 상부의 편지를 받고 머뭇거리자, 전우치는 자신에 관한 일임을 직감했다. 박광우는 숨겨주려 했지만, 전우치는 "나한테 방도가 있네"라며 거부했다. 그날 밤, 그는 스스로 목을 맸다. 도사의 길을 걷던 한 지식인이 유교 중심의 사회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언제 썼는지는 모르지만, 전우치는 이런 시를 지었다. 앞부분은 생략하고 끝부분만 소개한다.
"도마뱀이 용을 조롱하니 진짜 용이 부끄럽다.산인(山人)이 소매를 치켜 올리고 일찍 돌아가니,계수나무 붉은 절벽, 풍경이 좋구나."도마뱀이 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용을 조롱하는 세상. 세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조롱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전우치도 마음껏 조롱했다. 그는 소매를 치켜 올리고 산속으로 되돌아가 자기만의 세상에 푹 빠졌다.
전우치 같은 16세기 도사들의 몰락과 함께, 조선 신선교는 결정적인 쇠락의 길로 빠져 들었다. 전우치의 죽음은 그런 상징성을 띠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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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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