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교실의 '듄(EBS)' 수업 유감

등록 2013.01.01 15:33수정 2013.01.0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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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이면서 2학년 8개 반의 문학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국어 교사다. 나에게는 한 달에 다섯 번(11월부터는 야자 반을 재편하면서 월 2, 3회 정도로 줄었다) 정도로 '야감'('야간 자율학습 감독'의 준말) 업무가 주어졌다. 밤 열 시에 야감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날에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몸의 생체 리듬이 완벽하게 흐트러진 탓이다.

작년 11월 말쯤이었다. 야감 끝 무렵에 한 녀석이 이런 소리를 했다.

"선생님, 야자 할 때마다 폭삭 늙는 것 같아요. 조금 전에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엉덩이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는 거 있죠."

아이 말을 듣고 서늘해지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정녕 '야만적인' 야감이다.

월요일 야감은 주말 뒤끝이 있는 날이라 몸이 더욱 힘들다. 그런 날은 대개 새벽 두 시 넘어서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얼마 전 월요일에도 그 핑계로 인터넷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다가 요상한 말 두 개가 눈에 띄었다. '듄아일체(EBS와 내가 하나가 되도록 열심히 공부함)'와 '닥듄공(닥치고 EBS 공부)'! 바야흐로 전국 고3 교실이 '닥듄 수업'이 돼버린 참담한 현실을 꼬집는 글에서였다. 몇 년 전 교과부가 수능 시험과 EBS 교재 연계율 80%를 발표할 때부터 우려했던 바 그대로다. '듄'은 컴퓨터 자판을 한글로 해서 'EBS'를 치면 생성되는 글자다.

'듄' 사랑은 흔한 말로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가기 위한 몸부림일 터. 그렇다면 '좋은' 대학이나 학과는 어느 정도 수준을 말하는 것일까? 고등학교가 대학을 가기 위한 곳인가? 대학 입시 결과로 학생과 교사와 학교를 평가하는 이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인문계 고교 교사는 그 위상을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하나? 많은 이가 대학에 목을 매는 이 거대한 현실이 있으니 결국은 '듄'을 받아들여 열심히 문제풀이를 해 줘야 하는 건가.

다음 날부터 이삼 일 간, '듄' 때문에 생긴 그런 씁쓸한 마음과 고민을 2학년 8개 반 수업에 들어가 학생들 앞에 풀어놓았다. 맨 먼저 너댓 명의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에 있는 4년제 대학 180여 개 중에서 몇 번째까지 좋은 대학으로 봐야 할까?"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요.', '10등까지요.', '30등까지요.' 등등의 대답이 나왔다. 어느 반에서는 무모하게도(?) 100등까지라는 대답이 나왔다. 도대체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에는 과연 몇 개 학교나 포함해야 할까?


다음 질문을 이어서 던졌다. '도대체 대학을 왜 가나?'하고. '남들 다 가니까', '좋은 직장 얻으려고', '부모님이 가라고 하니까', '안 가면 불안해서', '졸업장 따려고' 등등의 대답이 나왔다. 내처 세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면 좋은 대학 가면 좋은 직장 얻나?"

몇몇 학생들이 그렇다고 대답은 하지만 별로 확신이 없는 눈치다.

그쯤에서 '우리 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의 올해 졸업생 취업률 61%를 말해 주었다. 대졸자 평균 취업률이 2년 연속 60%를 넘지 못한다는 통계 자료도 덧붙였다.(교육과학기술부; 2011년 58.6%, 2012년 59.5%) 대기업체 직원들의 평균 근속 연수가 10년이 채 안 되는 곳도 수두룩하다고 곁들인다.

학생들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모두가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눈치다. 그때 나는 '도발적으로' 물었다.

"'사오정(45세에 정년을 맞음)'이니 '삼팔선(퇴직을 고려하기 시작하는 심리적 하한선이 38세임)'이니 '이태백(20대의 태반이 백수임)'이니, 심지어 '삼포 세대(불황과 일자리 불안정으로 인해 우리 인생의 중요한 세 가지 일, 즉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세대. 최근에는 이 세 가지에 취직이 추가되어 사포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함)'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데, 비싼 등록금 들여가며 정말 대학을 가야 하는 거야?"

말이 끝나자 제법 많은 아이들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진다.

'듄'으로 시작한 짧은 계기 수업의 마무리는 내년 수업에 대한 '사전 포고'로 이루어졌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나는 지금의 2학년 학생들과 함께 3학년으로 올라가 그들을 다시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년에 수업 시간에 '듄'을 다루지 않겠다. 3학년 교과 과정에 맞게 차근차근 수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다. 혹시 '듄'을 다루더라도 결코 일방적인 문제 풀이로는 가지 않겠다."

학생들을 보니 모두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다. 그때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결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격으로 대학 진학을 고려하지는 말자!"

당연한 얘기지만, '듄'이 고3 교실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학 입학이 고3의 전부는 아니다. 너도나도 모두 대학을 가는 것 같지만 최근 3년 간 대학 진학률은 꾸준히 떨어졌다. 정점을 찍었던 2009년에 80%에 육박했던 비율이 올해에는 71.3%로까지 감소했다(교육과학기술부, 한국교육개발원, '2012년 교육 기본통계'). 10명 중 3명 정도는,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대학이 아니라 사회에서 20대의 청춘을 시작하는 셈이다. 이 감소 추세는 학생 수 감소와 더불어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애써 들어간 대학을 스스로 박차고 나오는 이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연간 6만여 명에 이르는 초중고 학생이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있는 곳이, 흔한 말로 '입시 공화국'이라는 2012년의 대한민국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들을 섞어가면서 우리가 대학에 꼭 가야 하는 것인지, 가더라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학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지, 지금 우리가 다니는 이 학교는 무엇을 위한 곳이어야 하는지 고민해 보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학교는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 관계 맺기의 소중함을 깨닫는 곳이 아니냐는 물정 모르는 말을 함께 전하면서 말이다. 기실 그럴 때 우리나라 공교육의 법정 문서인 교육 과정에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민주 시민이 양성되지 않겠는가.

2012년 늦가을, 나는 '듄 거부 선언'을 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489542)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듄(EBS) #듄아일체 #닥듄공 #대입 #교육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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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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