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왕의 꿈>의 김춘추(최수종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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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친미파들은 자신들과 김춘추를 동일한 범주에 넣으려고 하지만, 그들과 김춘추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친미파는 돈을 쓰면서 미국을 붙들고 있는 데 비해, 김춘추는 돈을 쓰지 않고도 당나라를 붙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망시킨 민족의 죄인이다. 따라서 김춘추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의 모든 면을 죄다 부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행적 속에는 현대 친미파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 의자왕의 압박에 시달리는 신라를 구하기 위해 김춘추가 642년에 고구려 연개소문을 방문했다가 감옥에 수감된 사례를 잘 알고 있다. 이때 연개소문이 그를 가둔 것은, 그가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아무런 대가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충북·경북 경계인 죽령 이북을 할양해주면 고구려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땅을 내줄 수는 없으니 그냥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무상 렌트'를 요구한 것이다.
당시 마흔 살인 김춘추는 사신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빈손으로 찾아온 그를 보고 고구려인들은 불쾌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김유신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고구려를 빠져나갔다.
<일본서기> '고토쿠 국왕(소위 천황)' 편에 따르면, 김춘추는 마흔다섯 살 때인 647년에 왜국으로 건너갔다. 비담의 쿠데타 와중에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진덕여왕이 즉위한 틈을 타서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던 때였다.
김춘추가 현해탄을 넘은 것은 왜국 군대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국 방문에서 목적을 거두지 못하자 곧바로 당나라에 가서 군대를 요청한 사실을 보면, 왜국을 방문한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국도 고구려처럼 김춘추를 억류했다. 그의 행동 패턴을 보면, 왜국에 가서도 '무상 렌트'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국 역시 고구려인들과 똑같은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이 황당한 신라 외교관에 대해 불쾌함과 황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대주의 외교 김춘추 따라하려면 제대로 해야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에도 김춘추는 무사히 일본을 빠져나왔다. 신라로 돌아온 그는 곧장 당나라로 직행했다. 방문 목적은 군대를 빌리는 것이었다.
두 번의 고초가 교훈이 됐는지, 김춘추는 이번에는 뭔가 하나를 준비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편에 따르면, 그것은 신라 관복 등을 중국식으로 바꾸겠다는 약속이었다. 당나라한테는 딱히 큰 선물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는 이런 방법으로라도 환심을 사려 했다.
관복을 당나라 식으로 바꾼다는 것은 분명히 자주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중대한 사안은 아니었다. 김춘추가 태어나기 이전인 4~6세기에는 중국대륙에서 유목민족과 중국 한족이 대결하는 과정에서 관복을 비롯한 의복문화가 상호 융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관복을 바꾸는 것이 당시로서는 크게 흠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북중국을 지배한 북위의 고조황제(효문제, 471~499년 재위)는 선비족의 언어를 스스로 포기하고 중국 한족의 언어를 선택했다. 정복자인 선비족이 피정복자인 한족의 언어를 택한 것은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서가 아니라 중국 땅을 좀 더 효과적으로 통치할 목적에서였다.
지금 우리의 감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문화를 채용하는 일이 흔히 발생했다. 그러므로 '군대만 빌려주면 신라 관복을 당나라 식으로 바꾸겠다'는 김춘추의 제안은 당시로서는 그렇게 굴욕적인 일이 아니었다. 물론 아주 잘한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