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의자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다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합니다...

등록 2012.12.23 20:47수정 2012.12.2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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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성기를 들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는 표창원 교수. 표 교수는 22일 광주 충장로 우체국을 찾아 프리허그를 진행했다.
확성기를 들고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는 표창원 교수. 표 교수는 22일 광주 충장로 우체국을 찾아 프리허그를 진행했다.이주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사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 '님을 위한 행진곡'

'반공주의자'와 '님을 위한 행진곡'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한 표창원 경찰대 교수-사직서는 냈지만 아직 수리되지 않음-가 '님을 위한 행진곡' 상징인 '빛고을'(광주)에서 목놓아 불렀습니다.

포항 출신의 한 반공주의자가 '80년 5월'의 현장인 광주 충장로를 찾았다. 경찰 출신에 아직까진 경찰대 교수인 그가 광주 충장로 한복판에서 시위 때나 쓰던 확성기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5년 동안 불리지 못한, 나아가 앞으로 5년간 또 불리지 못할 수도 있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이 반공주의자를 보기 위해 광주 시민은 충장로 바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노래를 합창했다. - 23일 <오마이뉴스> '반공주의자, 광주서 '님을 위한 행진곡' 열창

포항에서 나고, 경찰대를 졸업한, 경찰대 교수. 이것만 아닙니다. 표 교수가 지난 22일자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한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해병대 출신으로 미군에 소속되어 대북 비밀 업무까지 수행한 분이라고 합니다. 표 교수 "어렸을 적부터 간첩이 우릴 공격할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커왔다"고 말했습니다.- 22일 <한겨레> "진정한 사과 하라, 그럼 나도 박근혜 지지한다"

이 정도면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런 그가 진보의 상징 노래인 '님을 위한 행진곡'을 그것도 광주에서 불렀습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정말 큽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님을 위한 행진곡은 '붉은 물'이 든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얼마나 이 노래가 싫었는지 이명박 정권은 지난 2010년 5.18 기념식 당시 '님을 위한 행진곡'대신 잔칫집에서 부르던 '방아타령'을 연주하려다가 거센 반발에 결국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님을 위한 행진곡은 울려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대통령은 2008년 첫 해에만 참석했고, 이후에는 총리를 대신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이명박 정권에게 5.18은 기념하지 않았으면 좋았고, 민주주의는 매우 낯선 존재였던 것입니다.

표 교수가 광주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광주시민을 위로한 사실이 알려지자 대선 패배 후 멘붕에 빠졌던 누리꾼들은 환호와 함께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표창원! 광주! 님을위한 행진곡! 언론자유! 정말 행복합니다."- @yse6****
"표창원. 당신은 보수 자격이 있습니다."- @kingco*****
"표창원 같은 사람까지 넘어오다니. 패배했지만 손에 카드는 넉넉해지는 야권이네요. 다음대선은 카드의 진보와 판돈의 보수 싸움이 극명하겠네요."- @mett****
"이것이 행동하는 지식인의 양심입니다." - @MarsLo*******
"눈물이 난다!!~ 그분의 용기가 감사해서.. 그분의 절심함이 느껴져서."- @hedgem*****
"표창원 교수님이 광주에 가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시민들과 같이 부르셨네요. 자칭 보수주의자라 하시는 분이... 힐링행보는 이분이 하고 계신듯... 본인도 직장 버리고 힘드실텐데... 정말 쉽지 않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Oris****

정말 표 교수는 보수 자격이 있습니다. 보수주의란 다른 사상과 이념을 무조건 배격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진짜 보수가 없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이번 대선 기간 동안 우리는 윤여준과 표창원이라는 보수주의자를 만났습니다. 역사의 진보는 진보주의자들 전유물이 아님을 이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 교수가 광주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가 더디지만 진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주개혁진영이 대선에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시민들은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표 교수는 "진 것이 아니라 이기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패배감과 열패감에 빠져 상대세력을 증오만 한다면 민주개혁 진영은 영원히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보수주의자이면서 반공주의자가 님을 위한 행진곡을 광주에서 불렀다는 사실만으로 1980년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진보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저 역시 표 교수처럼 경상도 '보리문딩이'입니다. 한때 전라도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가득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누구보다 광주를 사랑합니다. 광주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서 끼친 영향력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경상도는 광주에 민주주의란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저는 광주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트위터리안 @voll****는 "올바른자 표창원 색깔이 확실한 보수 표창원을 반길 줄 아는 광주는 영원한 민주화의 성지다"고 했습니다. 백 번 동의합니다.

민주시민들이여. 더디게 진보하는 역사 앞에 좌절하지 말고, 뚜벅뚜벅 나아가야 합니다. 좌절은 수구기득권이 바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진정한 보수는 진보세력이 좌절하지 않고 다시 딛고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보수와 진보는 민주주의라는 목적지는 같지만 거기에 다다르는 방법은 조금 다를 뿐이지 틀렸다며 서로를 정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수주의자 표창원을 만난 것만으로 허망하게 뚫렸던 가슴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가슴은 바로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위로하고, 지혜를 모을 때 채울 수 있습니다.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합니다.
#표창원 #님을 위한 행진곡 #민주주의 #역사의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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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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