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때 분향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모습.
새누리당 제공
지난 60여 년, 우리 현대사는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호사가들이 말하길 다른 나라라면 600여 년 동안 겪었을 일을 불과 60여 년간 다 경험했다고 할 정도다. 역사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가져온 원인을 현대사에서 찾아본다면 무엇이 될까. 단언컨대, 그 모든 것은 이 세 가지로 수렴된다.
첫째는 친일 청산의 문제요, 둘째는 군사독재정권이 남긴 유산의 문제이며, 마지막으로 영·호남 간 극심한 지역갈등을 들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개별적인 과거사 문제임과 동시에 서로 인과관계로 얽혀있는 난제기도 하다. 입만 열면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외쳐대지만, 이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기대할 수도, 미래를 논할 수도 없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다.
이들은 하나같이 진심 어린 용서와 화해, 그리고 뼈아픈 성찰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흔히 말하듯 '시간이 약'이라면, 애초 역사 같은 건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통의 과거사는 덮는다고 묻히거나, 가린다고 숨겨질 수 없는 법이다. 되레 정부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체의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야말로 근본적인 치유와 해결의 지름길이다.
문제는 그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박근혜 당선인이라는 점이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의 과오를 딸에게 책임 지우는 건 온당치 않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노릇이다. 과연 최고 국정 책임자로서, 박근혜 당선인은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을 수 있을까.
나는 단언컨대 불가능하다고 봤다. '5·16과 유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인식에 줄곧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모순된 이 언급은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는 딸이자 공인으로서 밝힐 수 있는 사실상의 최대치다.
박근혜 당선인은 통합을 국정 운영의 첫 번째 과제로 손꼽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 할수록, 그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의 과오가 들춰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곧, 아버지의 공적을 높이 기리면서 우리 사회가 통합되기를 바란다면 모순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동원'일 수밖에 없는 탓이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위 세 가지 난제 중 어느 것 하나 거리낄 게 없는 인물이었다. 본인이 피해자였을지언정 결코 그에게 책임을 물을 게 없다는 이야기. 따라서 책임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그가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난제들을 주저함 없이 돌파해낼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고, 이것이 내가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이번 선거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땅의 장삼이사들에게 질곡의 현대사는 어디까지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역사'일 뿐이고, 선거는 '바로 오늘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것이 더 많은 유권자가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박근혜만 현실을 논했다? 5년 전과 달라진 게 없군요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멘붕'을 치유하려니, 인터넷에서는 전문가라 자처하는 이들이 민주당의 패인을 분석한 기사와 앞으로를 전망하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그중 '박근혜가 현실을 이야기할 때, 문재인은 정치와 과거사만 외쳤다'는 어느 수도권 중산층 유권자의 주장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재인 후보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밀린 이유를 거기에서 찾은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는 팍팍한 현실이 기실 잘못된 정치고 비롯된 것인데도 정치와 현실을 전혀 무관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거칠게 말해서 5년 전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만 원짜리 지폐 몇 장 찔러줄 것'으로 기대하며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던 기준과 사고방식에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이다.
순간 사학과에 진학하겠다는 자녀에게 '역사가 밥 먹여주냐'고 발끈하며 학교로 전화해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는 어느 학부모와, 수능에 선택도 하지 않을 과목을 굳이 수업해야 하는지를 따져 묻는 어느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선거판에서 정치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후보는 반드시 낙선한다는 불문율이 생길까 두렵다.
'민주당'이란 고유명사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