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연금되어 있는 아로요 전 대통령.
필리핀 신문
혁명보다 개혁이 어렵다고들 한다.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당선 이후에도 반대 세력의 책동으로 엄청난 곤란을 겪었다. 그 후 몇 차례 대통령 선거가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발전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특히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란 더더욱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아키노 대통령의 후임은 피플 파워에 참여하였던 부 참모총장 피델 라모스였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음에는 서민 이미지를 내세운 배우 출신 조셉 에스트라다가 당선되었다. 그는 부정비리에 연루되어 제2차 피플파워로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쫓겨난(?) 에스트라다가 2010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이노이 당선자 다음으로 2위를 하였다. 항간에는 에스트라다가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꽤 많은 국민(서민들)이 에스트라다를 지지했다. 심지어 그와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던 비나이는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필리핀은 러닝메이트제도지만 대통령과 부통령에 각각 투표하여 선출한다- 에스트라다가 물러나자 부통령이었던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가 대통령직을 대행했다.
아로요는 '대통령의 딸'이었다. 마르코스 직전에 대통령을 했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그녀의 아버지였고 그는 1965년까지 재임하였다. 한국 독자라면 눈치챌 만한 재미있는 사실은 마카파갈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이 겹친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정치적 후광이었겠지만 아로요는 나름 능력이 있는 여자였다. 필리핀 최고의 사립대학인 아테네오 대학의 전도양양한 교수 출신이다. 그녀가 대학에 재직할 때 '강의수첩'에 의존하는 읽기에만 능통한 교수란 풍자는 없었다. 두 번째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된 아로요는 총 10년동안 재임하였다.
아로요, '선거결과 조작 지시' 드러나 위기 맞기도
이명박 대통령 재임기간이 겹치는 '여성대통령' 아로요에게는 웃지못할 희극이 몇 편 있다. 첫 번째는 "헬로 가르시 스캔들"이다. 2004년 대통령 선거 때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아로요가 선거관리위원회 공직자였던 가르시와 나눈 비밀대화가 문제가 되었다. 이 비밀대화가 녹음되었다는 주장이 나왔고 이후에 결국 공개되었다. 이 녹음테이프에는 아로요가 가르시에게 선거결과를 조작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 여인이 선거관리위원회 간부인 가르시에게 "헬로 가르시, 내가 1백만표 이상 앞서가게 될거죠?"라고 묻는 내용이 있다.
테이프가 공개된 후 아로요 퇴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아로요는 대국민 사과 성명에서 테이프 속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기는 맞지만 선거조작을 지시한 적은 없다는 아리송한 말로 사태에 대응하였다. 몇 차례의 탄핵운동이 있었지만 결국 연합세력을 규합한 아로요는 자리를 지켜냈다.
두 번째는 전통적인 부정부패, 뇌물, 비리와의 연관으로 그의 남편과 아들의 이름이 각종 비리사건에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가장 쇼킹한 것은 대통령직을 마치면서 동시에 하원의원에 출마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는 대선, 총선, 지방선거가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아로요는 차기 대선, 총선, 지방선거에서 현임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마치면서 고향지역인 빰빵가에 하원의원으로 출마한 것이다. 아로요 정권의 임기말에는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이 한창 논란이 되었다. 아로요가 내각제로 개헌한 후 의회를 장악한 후 최고권력을 유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개헌 움직임은 차단되었지만 아로요의 하원진출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아로요 측은 "헌법 어디에도 현직 대통령이 하원의원에 출마할 수 없다는 규정은 없다"고 주장했고, 반대파들은 "어느 누구도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하원의원에 출마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시하지 않은 것이지, 대통령 중임이 허용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상식적으로 하원의원 출마는 불가하다"고 받아쳤다. 결국 그녀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하원의장에 도전하였으나 좌절되었다.
최근의 한국사도 필리핀 현대사와 오버랩되는 장면이 여럿 있다. 가장 먼저 디도스 선거 부정 사건을 꼽을 수 있다. 2011년 10.26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시민들의 투표참여를 막기 위해 중앙선관위와 야당후보 홈페이지를 공격하여 다운시키고 선거를 방해하였던 사건이다. 문제는 이것이 여당인 당시 한나라당 고위급 의원이 관련되어 치밀하게 준비하였다는 혐의이다.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의 비서와 박희태 국회의장의 비서가 구속되었고 선거부정을 시도하기 위해 1억 원이라는 돈이 소요되었다는 혐의가 나왔다. 하지만 검찰은 결국 각각의 전임 비서들끼리 계획한 것이고 한나라당과는 무관하다는 결정을 내려 외압에 의한 '꼬리자르기' 수사라는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후예 새누리당과 새누리당 소속 이명박 대통령의 행정부는 최근에도 선거부정을 계속 저지르며 발각될 때는 '꼬리자르기' 수법을 사용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며칠 전에는 국정원 소속 직원이 유력 야당후보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방 댓글을 달았다 하여 선관위와 경찰이 방문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국정원 직원이 아니라고 속인 그녀는 결국 13시간이나 문을 걸어 잠가 증거인멸의 의혹을 받고 있다.
이어 윤종훈 새누리당 SNS미디어본부장이 '불법 댓글 알바팀'인 '십알단'을 운영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윤 본부장의 미등록 사무실에서는 박근혜 후보 명의의 임명장이 무더기로 나왔다. 팟캐스트 방송에는 윤씨가 새누리당과 밀착하여 불법선거운동을 한 내용이 공개되었다. 그런데 윤씨는 자신의 목소리는 맞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혐의를 부정하였다. 아로요 필리핀 전 대통령의 "헬로 가르시 스캔들"을 상기시킨다.
양쪽은 사실을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 독재정권하의 부정선거와 마찬가지로 선거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하에서처럼 투표 결과가 조작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과연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져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할 수 밖에 없다. 세계의 언론과 시민들은 한국의 대선에 대해 뭐라고 할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 갈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