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인천민예총 사무국장 재임 시.
성효숙
시인은 1993년 산곡동에서 부평4동으로 이사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 햇빛이 잘 드는 집이었다. 아내 성효숙(화가)씨는 시인이 처음에는 이 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인은 혼자 산책하면서 사색하는 걸 좋아했다. 산곡동 살 때는 원적산이 있었는데, 이사한 집은 가까운 곳에 산이 없었다. 그러다 집 근처에 신트리공원이 있다는 걸 알고는 무척 좋아했다. 이후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이사한 해, 그의 세 번째 시집 '김미순 傳(전)'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이 시집은 노동과 현실에 투철한 문학정신을 평가받아 이듬해인 1994년 그에게 제12회 신동엽 창작상을 안겼다. 시인으로 등단한 후 처음 받는 상이었다. 그는 이 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한겨레신문(1994년 3월 24일자)과 한 인터뷰에서 "노동시를 잘못 규정할 경우 소재주의에 빠지기 쉬운데, 제 생각으로는 누구를 등장시키든 노동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시가 진정한 노동시입니다. 그런 의미의 노동시를 계속해서 쓰고 싶습니다"라며 노동시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권위를 인정받는 상을 받은 것은 시인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성효숙씨는 "시인은 자신이 고교 중퇴라는 걸 힘들어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학벌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맥이 있다. 출신학교 그 자체로 인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시인은 같은 시를 써도 더 노력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상을 받은 후 뭔가가 크게 달라졌다기보다는 그동안 노동시를 써온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오래 고생하면 뜻이 꺾일 수도 있는데 적절한 시기에 상을 받았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세상이여, 내 친구 영근이에게 예의를 지켜라그는 1995년 인천민족예술인총연합(인천민예총) 창립 멤버로 참여하고 1997년 네 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 뜨는가>(창작과비평사)를 출간했다. 이듬해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가 창립했는데, 그는 2000년까지 부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문학단체 일을 하며 장르를 떠나 수많은 예술인과 교류했다. 이 시기, 부평에 살면서 박 시인과 두터운 정을 나눈 정세훈(현 인천작가회의 회장) 시인은 "이미 문화단체가 있었지만,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에 실망했다. 민족예술과 자유로운 표현을 위한 새로운 단체가 필요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정 시인은 "박 시인은 술자리에서 선배들과 문학정신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비위에 안 맞으면 선배에게 쓴 소리도 곧잘 했는데, 내게는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아마도 시인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하루 12시간씩, 소금을 집어 먹으며 일했다.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땀을 많이 흘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쓰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시인이 노동자로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주로 원고료를 받거나, 학원에서 문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었다. 같이 노동시를 쓰는 처지에서 아마도 미안함이 있었을 것이다."성효숙씨도 "그는 태생이 예술가"라며 "한 군데에서 오래 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학원강사도 잠깐 했을 뿐이다. 그는 일상에서 시를 읽고 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시인 생활의 한 단면을 그의 친구인 신현수 시인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전략) 내 친구 영근이는 / 청사에서, 풀빛에서, 실천문학에서, 창비에서 / 시집도 네 권이나 내고 / 민족문학 진영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 신동엽 창작기금까지 받은 중견시인인데, / 그런 영근이에게 / 감히 이 세상은 / 모파상에 대하여 써보라는 둥, / 졸업장을 가져와 보라는 둥 웃긴다 / 중퇴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데 / 무슨 대학교 졸업장이냐 / 논술학원 교사채용 시험보고 와서 / 술을 먹는데 / 영근이는 눈물 글썽이며 / 자존심 때문에 졸업장 없다는 말은 못하고 / 문학단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 안 되겠다고 했단다 / 세상이여 제발 / 내 친구 영근이에게 / 예의를 지켜라 (시 '박영근' 중에서)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