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여, 제발 시인에게 예의를 지켜라

[고 박영근 시인] 솔아 푸른 솔아 3

등록 2012.12.12 18:27수정 2012.12.17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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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청 옆 신트리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시(詩)가 새겨진 커다란 돌 하나를 만날 수 있다. 2006년 타계한 고(故) 박영근 시인을 기리는 시비이다.

박 시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시집인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펴내며 노동시의 주춧돌을 놓았다. 시비에 새겨진 '솔아 푸른 솔아-백제 6'은 1990년대 저항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울렸던 노래, '솔아 솔아 푸른 솔아'의 원작시이기도 하다.


박영근 시인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여년 동안 부평에서 살았다. 시인은 이 기간에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상,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 수상 등 그가 남긴 화려한 이력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뤄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인은 생전 신트리공원길을 자주 거닐었다고 한다. 그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가 남긴 시,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이들을 통해 되짚어보았다.

'노동시'다운 생명력 있는 시

 1994년 신동엽 창작상 시상식장에서 선배들과 찍은 기념사진. 꽃다발을 든 이가 박영근 시인이다. 현기영ㆍ최원식ㆍ김윤수ㆍ백낙청ㆍ구중서ㆍ신경림씨의 얼굴이 보인다.
1994년 신동엽 창작상 시상식장에서 선배들과 찍은 기념사진. 꽃다발을 든 이가 박영근 시인이다. 현기영ㆍ최원식ㆍ김윤수ㆍ백낙청ㆍ구중서ㆍ신경림씨의 얼굴이 보인다.성효숙

그 방 용접불꽃에 먹혀 뜨거운 모래알이 구르는, / 벌겋게 달아오른 쇳조각 같은 눈으로 / 문건을 읽었다 이 빠진 받침들과 / 시커멓게 뭉개진 활자들은 바로 세우고 / 읽고 나선 서둘러 아궁잇불에 태우던 / 한밤중, 어둠속으로 피세일을 나갔다 달빛은 / 골목 어귀에 소식지 위에 날을 세우며 떨고 / 보안등 불빛에 쫒기며 한바퀴, 또 한바퀴…. 돌아와 / 새벽시장 봉지김치에 라면밥 말아먹던 방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 뜨는가>에 수록된 시 '그 방' 중에서) (*피세일 : 1980년대 운동권 은어로 유인물을 은밀히 배포하는 행위)

1980년대 중반은 군부독재를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전국에서 인천으로 모여든 시기였다. 시인(당시 27세)도 노동문화 활동을 하는 이들과 함께 1987년 인천으로 왔다. 그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부평구 산곡동 명신여고 근처. 동료 문인들과 학습소모임을 꾸려 암흑과도 같은 시대 속에서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고민했다.


시인은 보르네오가구 공장 등에 취직해 생산직 일을 하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집회에도 참여하고, 두 번째 시집 '대열'(풀빛출판사)도 출간했다. '대열'은 구로3공단에서 겪은 생생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했다.

친구들이 쓰러지고 있어요 / 탈춤 팔목장단 가락에 해고의 사연을 담으며 /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하더니 / 어깨춤 한 번 올리지도 못하고 / 어린 경실이 복숭아꽃처럼 어둡게 떨어져 / 병원으로 실려가고 호소문을 쓰던 경순이는 / 찬물만 들이키다 / 한 웅큼 구역질로 물을 다시 토해내며 / 못다 쓴 호소문구절 깔고 바닥에 눕고 / 쓰러지고 쓰러짐으로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 어머니, 저는 왜 이 대열에 섰을까요 (시집 <대열>에 수록된 시 '어머니, 저는 왜 이 대열에 섰을까요' 중에서)


'1980년대 노동시 연구'(박철석, 2002)는 "일하는 사람들, 눈물과 한숨이 덕지덕지 묻은 생활 속에서도 한 오라기 희망을 붙잡고 나아가는 사람들, 특별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투박한 사투리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시집 전편에 들어 있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담겨있고 작업장과 자취방과 야유회장과 출근하는 버스 안, 주변 다방과 개천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모든 터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서술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 곳곳에 파고 있는 '문제'가 낱낱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해결을 위한 모색으로 노동자 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현장'으로" 시의 시선이 집중돼간다고 해석했다. 즉 "'글' 또는 '이야기'와 '생활', 그 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해내려는 '싸움'과 '발전'은 본질적으로 연관돼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가운데서야 시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며 "이런 면에서 박영근의 시는 '노동시'다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서술했다.

시집 '김미순傳'으로 신동엽창작상 수상

 2000년 인천민예총 사무국장 재임 시.
2000년 인천민예총 사무국장 재임 시.성효숙

시인은 1993년 산곡동에서 부평4동으로 이사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 햇빛이 잘 드는 집이었다. 아내 성효숙(화가)씨는 시인이 처음에는 이 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인은 혼자 산책하면서 사색하는 걸 좋아했다. 산곡동 살 때는 원적산이 있었는데, 이사한 집은 가까운 곳에 산이 없었다. 그러다 집 근처에 신트리공원이 있다는 걸 알고는 무척 좋아했다. 이후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이사한 해, 그의 세 번째 시집 '김미순 傳(전)'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이 시집은 노동과 현실에 투철한 문학정신을 평가받아 이듬해인 1994년 그에게 제12회 신동엽 창작상을 안겼다. 시인으로 등단한 후 처음 받는 상이었다. 그는 이 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한겨레신문(1994년 3월 24일자)과 한 인터뷰에서 "노동시를 잘못 규정할 경우 소재주의에 빠지기 쉬운데, 제 생각으로는 누구를 등장시키든 노동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시가 진정한 노동시입니다. 그런 의미의 노동시를 계속해서 쓰고 싶습니다"라며 노동시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권위를 인정받는 상을 받은 것은 시인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성효숙씨는 "시인은 자신이 고교 중퇴라는 걸 힘들어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학벌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맥이 있다. 출신학교 그 자체로 인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시인은 같은 시를 써도 더 노력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상을 받은 후 뭔가가 크게 달라졌다기보다는 그동안 노동시를 써온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오래 고생하면 뜻이 꺾일 수도 있는데 적절한 시기에 상을 받았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세상이여, 내 친구 영근이에게 예의를 지켜라

그는 1995년 인천민족예술인총연합(인천민예총) 창립 멤버로 참여하고 1997년 네 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 뜨는가>(창작과비평사)를 출간했다. 이듬해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가 창립했는데, 그는 2000년까지 부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문학단체 일을 하며 장르를 떠나 수많은 예술인과 교류했다. 이 시기, 부평에 살면서 박 시인과 두터운 정을 나눈 정세훈(현 인천작가회의 회장) 시인은 "이미 문화단체가 있었지만,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에 실망했다. 민족예술과 자유로운 표현을 위한 새로운 단체가 필요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정 시인은 "박 시인은 술자리에서 선배들과 문학정신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비위에 안 맞으면 선배에게 쓴 소리도 곧잘 했는데, 내게는 단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아마도 시인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하루 12시간씩, 소금을 집어 먹으며 일했다.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땀을 많이 흘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쓰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시인이 노동자로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주로 원고료를 받거나, 학원에서 문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었다. 같이 노동시를 쓰는 처지에서 아마도 미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성효숙씨도 "그는 태생이 예술가"라며 "한 군데에서 오래 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학원강사도 잠깐 했을 뿐이다. 그는 일상에서 시를 읽고 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시인 생활의 한 단면을 그의 친구인 신현수 시인의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전략) 내 친구 영근이는 / 청사에서, 풀빛에서, 실천문학에서, 창비에서 / 시집도 네 권이나 내고 / 민족문학 진영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 신동엽 창작기금까지 받은 중견시인인데, / 그런 영근이에게 / 감히 이 세상은 / 모파상에 대하여 써보라는 둥, / 졸업장을 가져와 보라는 둥 웃긴다 / 중퇴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데 / 무슨 대학교 졸업장이냐 / 논술학원 교사채용 시험보고 와서 / 술을 먹는데 / 영근이는 눈물 글썽이며 / 자존심 때문에 졸업장 없다는 말은 못하고 / 문학단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 안 되겠다고 했단다 / 세상이여 제발 / 내 친구 영근이에게 / 예의를 지켜라 (시 '박영근' 중에서) (다음에 계속)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박영근 #시인 #노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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