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에서의 관광객들. 앵무새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귀엽다.
홍성식
올드타운으로 돌아와 허름하지만 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식당에서 맛본 종잇장처럼 얇은 엔초비 피자. 한국에서는 피자를 1년 가야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내게 '이런 맛의 피자도 있구나'라는 놀라움을 안겨줬다. 그 레스토랑 역시 민박집 여성이 알려준 곳이었다.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숙소 근처 언덕에 앉아 해지는 것을 바라봤다. 붉은 지붕, 푸른 바다, 붉은 해, 푸른 하늘. 지상의 풍경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메마른 성정 탓인지 자연경관에 감탄하며 살지 못했다. 크로아티아는 그런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스스로도 놀랐다. 내가 풍경에 감동할 수도 있는 인간이었다니.
더운 날씨에 이곳저곳을 마구 헤매다 보니 일찍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지. 속사포 같은 남자의 취기 어린 목소리와 여성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주인 사내와 아내였다.
크로아티아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상황이야 왜 짐작이 되지 않겠는가. 새벽에 남자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여성이 운다는 것은 싸움이다. 부부싸움.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달아나버린 잠을 다시 부르며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참을 계속되던 남자의 투정 섞인 화난 목소리와 여성의 울음은 창밖이 훤히 밝아올 무렵에야 끝났다.
무슨 일일까? 인간은 호기심과 궁금증 때문에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존재다. 모른 척하기에는 내게 친절을 베풀어준 주인 여성이 너무 불쌍했다. 느지막하게 거실로 나갔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주인 사내는 잠들었는지 여성 혼자 낡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침인사를 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아직 빨갛다. 커피 한 잔을 가져온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른 시간에 잠이 깼을 것인데 미안하다. 남편은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아주 가끔 술에 취하면 저런다. 20대 초반에 전쟁에 나갔는데 그 상처 때문이다. 정말 미안하다." 거기다 대고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괜찮다. 나는 잠들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고 얼버무리는 것 외엔 더 해줄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