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차 만드는 시간...집 안 가득 유자향기 가득하고...
이명화
등산하듯 유자를 썰자. 한 걸음씩 등산길 오르듯이 유자 한 개, 한 개를 채 썰자. 그러면 썬 유자가 가득 쌓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 양이 많다 보니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뒤틀렸다. 계속 작업을 하다 보니 유자 채는 조금씩 쌓여가고 손은 탄력이 붙었다. 나는 역시 채썰기의 달인인가 보다.
처음에는 조금 하다가 힘들면 미루고 나중에 쉬엄쉬엄 하지 뭐! 하고 생각했지만, 일단 뭔가를 손에 잡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 뜨개질도 한 번 손에 잡으면 몰아서 한꺼번에 해치우려 하는 성격이다.
밤이 맞도록 나는 홀로 앉아 유자 채를 썰고 또 썰었다. 묵상하듯이, 산에 오르듯이, 뜨개질하듯이... 그렇게 유자 채를 썰고 또 썰었다. 한석봉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떡을 썰었던 것처럼 나는 한 걸음씩 등산길 오르는 것을 생각하며 뜨개 실로 옷을 짜듯이, 글을 쓰듯이, 책을 읽어나가듯이 유자 채를 썰었다.
밤은 깊어가고 창 밖엔 차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릴 뿐 주변은 고요하다. 신 새벽이 되도록 유자 채를 만들었다. 서재 안 가득 유자향이 배였다. 밤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막막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유자도 점점 줄어들었고, 채 썬 유자는 소복소복 쌓여갔다.
읽은 책을 독서일기에 적다 말고 덮어놓은 노트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있고, 노트북은 절전으로 화면이 깜깜했다. 읽다 만 책도, 쓰다만 글도 제쳐놓고 있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유자 썰기는 곧 글쓰기다. 떡 썰기다. 이것은 높은 산 정상을 까마득히 올려다보며 한 걸음씩의 힘으로 올라가는 등산이라고 생각했다. 유자 채 썰기를 하면 할수록 손은 더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움직였고, 유자는 내 손 칼날 아래서 잘디잘게 채로 썰렸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소복소복 쌓인 유자는 어느새 동나고 유차 채는 한가득 만들어졌다. '와~ 이걸 나 혼자서 이 밤에 다 하다니, 장하다 장해.' 손목이 얼얼할 정도로 초저녁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홀로 서재에 앉아 유자 채 썰기를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유자는 바닥을 보였다. 이제 몇 개만 더 썰면 된다. 허리도 아프고,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채썰기의 여왕, 너 왜 이렇게 잘 써는 거야.'
그 순간, '아앗~' 숫돌로 날카롭게 갈아두었던 칼에 엄지손가락 끝이 살짝 베이고 말았다. 금방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잠깐 방심했던 거다. 나는 얼른 화장지로 손가락을 감싸고 지혈을 했다. 피가 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밴드를 붙이고, 다시 썰기를 시작했다. 칼에 베인 손가락 때문에 작업 속도가 나지 않고, 상처 난 손가락에 유자 액이 흘러들어가 따갑다. 하지만 얼른 끝내야 하니, 쓰라린 손을 쥐고 유자 채를 계속 썰었다.
이제 한 개 남았다. '아, 다했구나.' 나는 한 개 남은 유자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저 썰었다. 산 정상 앞에 서기 일보 직전이고, 뜨개질 마지막 매듭 단계다. 남은 유자 썰기도 끝. 유자가 담겼던 그릇은 텅 비고, 유차 채를 담은 그릇은 수북하게 쌓였다. 긴 시간이었지만, 혼자서도 재미있고 즐겁게 유자 채를 썰었다.
나는 이제 비타민C 보고이고 감기와 신경통, 풍 치료와 예방에도 좋고, 혈액순환을 도와주는 이 좋은 유자차를 좋은 사람들과 나눠 먹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그리고 겨우내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향기롭게 할 것을 생각하면서 유자 채에 설탕을 넣고 버무렸다. 완성된 유자차를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냉장고에 넣었다. 서재 바닥에 깔린 신문지를 걷고, 걸레질을 한다.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유자가 왔다. 올겨울도 내가 만든 유자차로 추위를 너끈히 이겨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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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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