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 서울 여의도 MBC 정문앞에 설치된 민영화 저지 MBC노조 천막농성장에 'MBC사장 김재철을 즉각 구속하라' 라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조재현
이 정권은 집권 이전부터 공영방송을 순치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 온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어용뉴스의 부활과 비판적인 시사프로그램의 절멸로 나타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25년간 꾸준히 신장돼 온 여론다양성 확대와 주류언론 곧, 조중동에 의해 농락돼 온 공론장의 정상화는 먼 옛날 얘기가 돼 버렸다. 사물을 '돈이 될 것인가, 아닌가(특히 자신에게)'로 판단하는 게 습관이 된 건설회사 CEO 출신의 대통령 이명박이 공영방송의 존재이유와 역사성을 알 턱이 없다.
MBC의 정치적 독립성과 제작진의 자율성을 지켜온 데는 공영방송이라는 회사의 지배구조와 노동조합이 큰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현 정권하에서 기존의 믿음은 철저하게 배반당했다. 다수당인 새누리당에 의해 추천된 인사들이 수의 논리로 이사회의 다수를 점하게 됐다. 이들이 뽑은 사장은 다시 인사권을 휘두르거나, 노사교섭을 외면함으로써 노조와 제작진의 권한을 간단하게 무시·침해해왔다.
방문진에서 여당 추천 이사들은 로봇이나 거수기처럼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6(여당):3(야당)의 표결결과를 보였다. 지배구조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을 경우 정치권력에 각을 세우는 비판적인 프로그램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공영방송 제도는 유럽에서 시행되고 있는 여러 공영방송 제도가 층위별로 섞여서 존재한다고 한다.
1)이념형적으로는 영국 BBC가 모델인 자유주의형 2)제도적·형식적으로는 북유럽에서 시행되는 정당과 시민사회의 목소리 반영체제 3)실질적인 운영에서는 이탈리아 등 남유럽처럼 정권장악 세력의 이해가 방송사 지배구조에 그대로 관철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중 어느 쪽이 됐든 이를 뒷받침할 사회문화적 토대가 미비하거나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즉 영국이나 북유럽 등 방송선진국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제도가 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려면 인프라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인프라에는 공영방송에 대한 집권자들의 철학과 관용, 아울러 정당 또는 사회운동과 결합된 조직적인 시민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외부의 사회문화적 조건이 단시일 내에 급성장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MBC 구성원들은 비록 170일 씩이나 파업을 했지만 아직도 더 많은 사회적 짐을 떠안아야 할 것 같다. 이같은 고통은 사실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고생하는 저 밑바닥 민중들의 삶을 이해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선 전에 양문석 위원이 폭로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집권여당을 위한 야합 음모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정권의 시녀가 된 검찰이나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 모두 힘을 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MBC를 비롯한 공영방송이 조중동의 아류방송으로 전락한 언론의 환경감시 기능도 기댈만한 게 못 된다.
따지고 보면 BBK에서부터 민간인 사찰, 내곡동 사저 터 매입 의혹에 이르기까지 이 정권 내내 이런 식이었다. 청와대와 관련된 어떤 의혹도 속 시원하게 밝혀진 적이 없다. 아쉽게도 한국사회는 유럽의 공영방송선진국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MBC 노동조합의 운동성만으로는 역사적·사회문화적 조건을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비관은 이르다. 한국은 역동성과 저력이라는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사회이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를 들어본다. 1980년 8월, 광주학살 주범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 할 때 외신기자들이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에게 한국 사람들이 과연 전두환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위컴은 "한국인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더라도 따라갈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다"고 일갈했다. 쥐떼로 비하된 한국인들은 그러나 1987년 전두환의 독재를 무너뜨렸다.
정치적 민주화로 표상되는 '87년 체제'를 대치했던 이명박 정권이라는 유사(類似)독재 체제가 끝나가고 있다. 국내적으로 재벌과 부자들의 마름이요, 국제적으로 미국의 이해관계에 복무해온 사대주의 정권에 대한 한국 유권자들의 심판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오는 12월 19일은 뇌사상태에 빠진 한국사회의 공영방송체제의 재활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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