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선생의 사후에 선생이 유덕을 받들고자하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으로 지어진 충효당 안채인 내당
이안수
서애 선생님은 저의 15대 선조입니다.
이 집의 당호가 충효당이 된 것은 서애선생님의 유언으로 남긴 시에 따른 것입니다. 후손에게 남긴 그 유시(遺詩)에 '면이자손수 충효지외무사업(勉爾子孫須 忠孝之外無事業 권하노니 자손들아, 충․효 외에는 다른 사업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집은 서애 선생님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서애선생님께서는 8년 동안 정승을 하고 내려오셨지만 먹을 것이 없고 집한 칸이 없었습니다. 내려오셔서 초가삼간에 계시다가가 옥연정사에 가셔서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를 집필하셨습니다. 1604년에 징비록의 저술을 마치고 같은 해 학가산 골짜기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을 지어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재산이 없고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선생께서 지었습니다. '임란(壬亂)에 이렇게 공이 많은 분의 신주(神主)를 모실 사당이 없어서 되겠느냐'고 영남 유림에서 도움을 받아 집을 완성했습니다.
처음에는 'ㅁ'자의 이 안채만 짓고 증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선생이 사랑채를 짓고 당호를 충효당이라고 썼습니다.
그 글씨가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서예가이신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입니다. 영덕 도곡동의 충효당, 삼척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文)도 이 분의 글씨이지만 그 후손들이 지금도 탁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탁을 합니다. 집에 병풍을 해 두겠다고, 미수선생 글씨 중에서 제일 명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문간채는 서애선생의 8대손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祖)선새이 여기에 계시면서 병조판서,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장관을 제수(除授)받으셨는데 국방부장관이니 병력이 와야되지않습니까? 당장 병력이 기거할 공간이 없어서 한 달 만에 지었습니다. 200여년전 한 달 만에 13칸을 짓는 게 기적이지요. 그렇게 이집이 완성되었습니다. 1964년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애선생이 임종 무렵 자손들에게 남긴 시의 원문입니다.
林間一鳥啼不息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
門外丁丁聞伐木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一氣聚散亦偶然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只恨平生多愧怍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勉爾子孫須愼旃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라
忠孝之外無事業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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