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메시지를 던져 준다. 향은 아내 김향안을 말한다. 이때 수화는 성북동에 살고 있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또 다른 이름은 동림이다. 동림과 향안의 관계,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동림은 변동림을 말하고, 김향안은 변동림이 수화와 결혼하면서 새로 갖게 된 이름이다. 그럼 그녀는 어째서 이름을 동림에서 향안으로 바꾼 것일까?
변동림(卞東琳: 1916-2004), 그녀는 천재를 알아보는 신여성이었다. 그녀의 첫 남편은 1937년에 요절한 시인 이상(1910-1937)이었다. 그들은 화가 구본웅(1906-1953)의 중매로 1936년 6월 결혼한다. 구본웅은 이상의 초등학교 동창이었으며, 변동림은 구본웅의 이모였다. 그러나 친 이모는 아니고 계모인 변동숙이 함께 데리고 온 배 다른 여동생이었다. 그러므로 구본웅이 이모인 변동림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그런데 결혼한 지 넉 달도 되지 않은 1936년 9월 이상은 도쿄로 건너간다. 이때 비용은 재력이 튼튼한 구본웅이 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은 이듬 해 2월 불령선인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4월 17일 건강이 악화되어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변동림은 도쿄로 가 남편 이상의 시신을 수습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4년 5월 1일 화가 김환기와 재혼한다. 그들은 결혼 전 이미 동거를 시작했고, 수화는 딸이 셋이나 있었다고 한다. 집에서는 반대가 심했고, 요즘 말로 호적을 파가라고 했던 것 같다.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수화와 향안의 성북동 수향산방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향안은 늘 남편 수화보다 앞서서 파리로, 뉴욕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그녀의 남편에 대한 헌신은 남편이 죽은 1974년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녀는 계속해서 뉴욕에 살며 남편의 그림을 알리는 일에 몰두한다. 1975년 뉴욕에서 회고전을 열었으며,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50여점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 좀 더 적극적으로 수화의 미술을 정리하고 연구하고 알렸다. 1992년에는 성북동에서 멀지 않은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워 연구와 전시, 교육과 문화 그리고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환기미술관의 설립자인 김향안은 '크고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 전시를 표방하며 좋은 미술관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을 지어놓았다고 해도 미술관을 돌아보고서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이 없을 때, 그 미술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녀는 수화와 자신의 취향에 맞게 시각적인, 음악적인, 시적인 예술을 추구한다.
수화가 아내에게 보낸 서화 옆에는 'GRAPES and CHERRIES'라는 재미있는 서화도 있다. 그리고 수화 자신과 아내, 자식들을 스케치한 서화도 있다. 이들 옆에는 아내 향안을 그린 초상화도 보인다. 그림의 성향이 표현주의적이다. 파리로 떠나기 전인 서울시대(1937-1956)의 작품으로 보인다. 김향안은 2004년 2월 뉴욕에서 죽었고,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웨스트체스터공원묘지 남편 곁에 묻혔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공존
순수시대전에는 동양화와 서양화가 공존하고 있다. 변관식, 김용준, 김기창의 작품이 동양화라면, 김환기, 윤중식, 권옥연, 변종하, 서세옥의 작품이 서양화다. 그리고 전뢰진과 최만린의 작품이 조소다. 동양화에서는 소정 변관식의 산수도가 눈에 띄고, 서양화에서는 윤중식과 서세옥의 작품이 눈에 띈다. 그리고 조소에서는 전뢰진의 화강석 작품이 눈에 띈다. 전뢰진은 가족간의 사랑,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낙천성과 순수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소정의 산수화는 우선 선이 진하고 스케일이 크다. 산과 폭포, 나무와 집이 있는 마을을 표현하면서도 먼 과거가 아닌 가까운 과거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마을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림 위에는 칠언절구가 쓰여 있는데, 천봉(千峰) 사이로 난 산길을 묘사하고, 그 아래 마을에서 석교(石橋)를 지나 폭포를 바라보는 선비들을 노래했다.
윤중식의 그림은 아무리 봐도 표현주의적이다. 향토적인 서정성을 강렬한 색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섬'과 '산'이 있다. 내 눈에는 섬이 훨씬 더 좋다. 빨간 해가 바다로 떨어지고 농부가 집으로 돌아간다. 농부가 돌아가는 길가에는 가로수가 서 있는데 석양을 받아 가지 끝이 빨갛게 빛난다. 집에서는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윤중식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삶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표현했다.
이에 비해 서세옥의 작품은 절제와 여백의 미를 보여주면서도 생동감이 있다. '즐거운 비'와 두 점의 '춤추는 사람들'이 있는데, 춤추는 사람들이 훨씬 더 인상적이다. 한지에 먹으로 형상만 그려서 동양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모습이다. 마티스의 '춤(Dance)'을 연상시킨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간결하면서도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이 실제 어떻게 활용되었나?
3층 전시실에는 이들 작가들의 그림이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김기창은 서울신문에 연재된 소설 <임꺽정>의 삽화를 그렸고, 변종하는 박두진 시집 <하얀 날개>의 표지화를 그렸다. 변종하는 월간 문학잡지 <현대문학>의 표지화를 그렸고, 서세옥은 김동리, 박재삼, 최민순 시인의 시집 표지화를 그렸다. 김환기도 김용호 시인의 <의상세례> 표지화를 그렸고, 김용준도 조선 아동문학협회에서 발간한 어린이 잡지 <소학생>의 표지화를 그렸다.
운보 김기창의 <임꺽정> 삽화는 선이 굵고 역동적이어서 소설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을 것 같다. 삽화라기보다 요즘 영화의 콘티를 보는 듯하다. 남녀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을 댓돌에 놓인 신발 두 켤레로 표현했고, 습격당하기 직전 관아의 모습을 아주 긴장감 있게 표현했다. 이들 작품은 운우미술관에 있는 것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잠깐 대여 받았다고 한다.
표지 그림 중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변종하의 <현대문학> 1956년 7월호 표지 그림이다. 판화기법을 도입해서 대상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주변도 마치 조각칼로 파낸 것처럼 거칠게 표현했다. 1910년대 독일 표현주의 잡지 <행동(Die Aktion)>과 <폭풍(Der Sturm)>의 표지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1980년대 민중미술이 30년 앞서 나타난 것 같기도 하다. 4층에 있는 변종하의 작품 '꽃과 새', '땅에 핀 별', 'Print' 등과는 상당히 다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시간을 갖고 변종하의 작품세계를 공부해야겠다.
나는 여기서 우리 미술관의 수준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구립미술관 정도에서 이런 차원의 전시회를 연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도록에 실린 큐레이터의 글도 괜찮다. 또 3층과 4층에 배치된 도슨트의 수준도 정말 높다. 국민대 대학원 회화과에 다니는 박정아 양과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유진아 양은 관객을 이끌고 함께 호흡하는 능력이 있다. 좀 아쉬운 게 있다면 도록에 나온 그림의 인쇄 수준이 낮다는 점이다. 현장에서 보는 그림과 도록의 그림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종이 질과 색분해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성북구립미술관의 '순수시대전'은 10월 11일 시작되어 12월 16일까지 계속된다.
2012.10.29 09:45 | ⓒ 2012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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