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IMF 모범 기업'으로 남양유업에 대한 당시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1998년 12월 7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홍원식 당시 대표 인터뷰 기사
<경향신문>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IMF 관리체제 아래서 사람들 얼굴에 잔뜩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던 그때, '빛'과 같은 소식이 신문들을 장식한다. 남양유업이 상업·조흥·신한은행 등에 남아있던 은행 차입금을 모두 갚음으로써 '부채비율 0%'라는, 당시로서는 더욱 경이로운 '성적표'를 받았다는 낭보가 보도된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남양유업의 '신화'는 충분히 조명 받을만 했다. 그로부터 몇 년간 "연간 매출 규모가 5천억 원을 넘지만, 부장이 회사의 사전 승인 없이 쓸 수 있는 돈은 불과 10만 원"이라든가, 그럼에도 "30년 넘도록 남의 빌딩에 세 들어 산다" 등 '구두쇠 경영'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됐다.
"남양유업의 제품 경쟁력과 수익성 제고는 '무차입 경영구조'에서 비롯된다. 금융비용이 없다보니 경쟁업체보다 생산원가가 줄어 그만큼 비싼 값을 치르고서도 고품질 재료를 사용하게 된다. 당연히 품질이 좋아져 잘 팔리게 된다. 수익도 비례해 늘게 된다."(2000년 6월 20일 <한국경제> 보도)남양유업의 '구두쇠 경영'이 더욱 빛났던 것은 쓸 때 쓰는 과감한 투자가 함께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사내 유보금만으로 천안 신공장 건설에 나섰을 때가 하이라이트. 이를 두고 "다른 회사가 공장을 팔 때 공장 부지를 매입하고 남들이 유동성 위기로 몸을 사릴 때는 신공장 건설에 1200억 원을 투자했다" "투자 우선 순위를 제품 개발과 생산성 향상이란 한 우물 파기에 깊이 두고 있다" 등의 극찬이 쏟아졌다.
홍원식 회장의 검소한 집무실도 화제동시에 '오너' 홍원식 당시 대표이사에 대한 보도도 잇따랐다. 특히 그의 집무실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는데, 당시 보도를 보면 "웬만한 기업 임원 방보다 작은 12평에 불과하다" "집무실에는 홍 사장 책상 한 개와 4인용 소파가 전부, TV나 비디오도 없고 카펫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다, 입구에 전화를 받는 여비서 한 명만 있을 뿐" 등의 관련 보도가 줄을 이었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그는 1950년 6월 12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경복고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보도에 따르면 대학 재학 중이던 1973년부터 강의가 끝난 뒤 회사로 와서 입출금 전표를 끊는 등 경리 업무를 봤을 정도로 가업을 적극 도왔다고 한다.
1974년 기획실 부장을 시작으로 경영수업에 들어갔다. 이후 1977년 이사, 1979년 상무, 1980년 전무, 1988년 부사장을 거쳐, 창업주인 아버지 고 홍두영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1990년 4월 대표이사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2세 경영'을 펼치기 시작한다. 1990년대 불가리스, 아인슈타인 우유, 아기사랑 수(秀) 등 잇따라 히트 상품을 내놓으며 남양유업을 성장궤도에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IMF 관리체제 아래서 빚을 모두 갚고 매출 신장을 거듭하는 기업, 오로지 한 우물만 파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기업은 '상복'도 잇따랐다. 남양유업은 1999년 가치경영 최우수기업상(한국능률협회)를 비롯해 2000년 경영실적 최우수 기업대상(대신경제연구소), 2001년 은탑산업훈장 등을 거머쥔다. '탈 IMF 모델'로 각광받는 기업 오너와 불미스러운 사건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에 분명했다.
리베이트 사건으로 구속... 깨지기 시작한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