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씨.
안윤학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엉터리 필적 감정은 강기훈의 유서대필, 분신배후의 확정적 증거로 받아 들여졌다. 6월 3일 한국외대에서 터진 '정원식 총리서리 밀가루 세례'는 유서대필 사건과 맞물려 민주진영을 '인륜을 저버린 패륜적인 범죄 집단'으로 낙인 찍었다. 6월 20일 시·도의회의원선거에서 민자당은 전국에서 564명의 당선자를 내 시도의회 2/3을 장악했다.
강기훈에게는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그해 11명의 분신·타살에는 '죽음의 배후' 의혹이 덧칠해졌다. 동지의 죽음에 분노했던 수많은 사람은 조직사건에 연루되거나 스승에게(외대 교수에서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된 정원식) 계란과 밀가루를 퍼부은 패륜아로 수배, 구속됐다.
분노는 넘쳐났으나 정권의 음모는 치밀했다. 유서대필과 분신배후 조작 음모는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다. 1991년 5월 10일 전남대에서 분신한 노동자 윤용하의 죽음을 두고도 당시 공안당국은 일을 꾸몄다.
윤용하의 형에게 접근해 "대학생들이 동생에게 술을 많이 먹여 만취하게 한 후 기름을 부어 죽이고 유서를 대신 써준 것으로 하자"고 회유했다. (관련 기사 -
'유서대필' 낙인, 대법원 언제까지 외면할건가) 내 학교 동료가 20여 일 구타와 고문으로 유서대필과 분신배후자로 강요받은 것 또한 정권의 음모였다.
당시 정권에게 분신배후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운동진영의 도덕성을 먹칠하고 정권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먹잇감, 정권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강기훈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분신배후자가 되어야 했다. 또 누군가는 스승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던진 패륜아가 되어야만 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트라우마. 박래군 인권재단 상임이사는 한 강연에서 "1991년을 체험한 사람 누구나 하나같이 큰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당시 동지와 친구를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고문받고 수배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고통이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군사정권의 희생양으로 동료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누명을 쓴 채 3년 옥살이한 강기훈은 어땠을까. 끔찍한 형벌이었으리라. 간암으로 투병중이라는 강기훈.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그에게 몹쓸 병을 안긴 건 아닐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 딴지 거는 새누리당대법원은 3년의 심리 끝에 지난 19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재심 결정을 내렸다. 더 끌지 않고 재심 결정을 내린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이 자체가 강기훈씨의 무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에 낙관할 일은 아니다. 하루빨리 재판이 속개되어 시시비비를 가리면 될 일이지만, 현실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당시 유서대필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 중 일부는 현재 새누리당으로 자리를 옮겨 박근혜 대선 후보를 돕고 있다.
일단,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기춘은 현재 박근혜 후보 측근인 '7인회' 멤버다. 수사검사로 참여했던 남기춘은 현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부장검사로서 수사를 지휘했던 강신욱은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맡았다.
남기춘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 위원은 대법원의 재심 결정에 대해 최근 "당시 수사 팀의 면면으로 봐서 수사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또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올해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재심결정 대해 "소신 없는 결정" "사법부 자신들이 고생해서 내린 판결에 대한 자해행위" 운운하며 대법원을 비판했다. 여당이 사법부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한국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재심은 너무 당연하다. 대선에 나서 대통합을 호소하는 박근혜 후보. 진실이 있어야 용서와 화해가 있고 대통합으로 갈 수 있다. 모처럼 이루어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결정. 딴지 걸며 막기보다는 진실로 가는 길에 힘을 보탤 일이다. 그게 대통합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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