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릉(왼쪽)과 괘릉은 가까이 다가서서 볼 때도 그렇지만, 멀리서 보아도 둘레의 소나무 조경, 아라비아인 분위기의 무인석, 돌사자 등 너무 닮았다.
정만진
괘릉을 빼어닮은 흥덕왕릉의 아름다움 흥덕왕릉은 멀리서 보면 괘릉인 듯 여겨진다. 서역인을 베낀 듯 빼어 닮은 무인상이 묘역을 지키고 있는 점도 같고, 네 마리 사자가 동서남북을 호위하고 있는 점도 같다. 왕릉까지 다가서는 좌우로 소나무들이 사열병처럼 줄을 지어 서 있는 광경도 같다.
너무나 닮은 두 왕릉을 보노라면, 원성왕이 죽은 해가 798년이고 흥덕왕의 부인이 타계한 해가 826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기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결론은 이렇다. 너무나 왕후를 사랑했던 흥덕왕이 '가장 아름다운 왕릉' 괘릉을 본떠 그녀의 묘를 만들지 않았을까!
또 왕은 재위 10년 동안 정을 쏟고 마음을 들어부어 묘소를 가꾸었을 것이다. 본인도 죽으면 그 무덤에 왕후와 함께 합장해 달라고 이미 유언까지 해두었다. 흥덕왕릉이 그토록 아름다운 까닭은 충분히 헤아려지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흥덕왕이 남긴 '사랑시', 전해지지 않아 안타까워게다가 흥덕왕은 유리왕처럼 시도 남겼다. 아마도 흥덕왕의 노래는 당대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그런 왕을 보다 못한 신하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선물을 구해왔다. 암수 한 쌍의 앵무새였다. 신하는 앵무새 부부를 통해 왕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신하의 기대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사이좋게 지저귀던 한 쌍의 앵무새 중 암놈이 먼저 죽어버렸다. 왕은 혼자 남은 그 수놈이 꼭 자신만 같아서 거울을 구하여 붙여주었다. 수놈은 거울 안의 앵무새가 제 짝인 줄 알고 처음에는 좋아했지만 이내 진실을 깨닫게 되었고, 구슬프게 울부짖다가 죽고 말았다.
유리왕처럼 흥덕왕도 새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보았다. 부인을 향한 사랑이 진심이었으므로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흥덕왕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