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로 단식 14일을 맞은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최지용
그가 다시 상복을 입었다. 동료의 22번째 상을 치르고 한참이 지났지만, 언제나 죽음이 주는 무게는 무겁기만 하다. 또 다시 시작된 죽음의 행렬을 막겠다며 밥도 끊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덕수궁 대한문 앞에 차려진 분향소 천막에서 생활한지 7개월째. 죽어가는 동료들을 살려달라는 외침 끝에 그는 자기 목숨을 걸기에 이르렀다. '정리해고'라는 한국사회 최대 현안의 꼭짓점에 서 있는 김정우 전국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
김 지부장은 잘 웃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도 항상 저음이고 '까칠'하다. 통화는 몇 마디를 못 넘긴다. 분노하고 호통치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노려보는 눈빛이 그의 평소 모습이다. 넉넉한 체격에 덥수룩한 수염은 그를 더 강해 보이게 한다. 어떤 사람은 김 지부장을 보고 "곰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려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막아서는 모습, 청문회에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발언에 탁자를 내려치는 모습이 그를 대표한다.
지난 21일 단식 10일째를 맞은 김 지부장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오랜 허기가 그를 견고하게 만든 듯했다. 그가 1년 넘게 지부장을 하는 동안 수많은 집회에서 그의 연설을 들었다. 쌍용자동차 사태의 심각성을 토로하며 정치권과 시민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항상 당당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계속된 반복이었고, 단식까지 시작한 마당에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게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 가족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준비한 질문은 첫 번째에서 막혀버렸다. 가족의 이야기를 묻는 질문에 그는 곧바로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안 한다"며 투쟁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번에 기선이 제압돼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기 시작했다. 딱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가 "1990년 쌍용자동차에 들어가, 20년 가까이 정비업무를 했다"는 거다. 정비지회를 책임지고 있던 그는 지난해 11월 3기 쌍용차지부장에 뽑혔다. 그날 이후 평택공장 앞에서, 대한문 길거리에서 사는 그의 삶이 시작됐다.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던 희망버스, 우리에게로 돌리고 싶었다"지난 2009년 정리해고 사태 이후 해고된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자살과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으로 21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고, 지난 4월 22번째 희생자는 정리해고 이후 구직에 실패해 절망적인 삶을 살다가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렇게 한동안 쌍용차 죽음의 행렬은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대한문 분향소에 시민들이 찾아오고, 사회적 관심이 모이면서 국회 청문회까지 개최됐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차려진 분향소가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가능했던 건 그만큼 사회적 관심이 모였기 때문이다.
- 국회 청문회까지 열렸는데 단식을 시작했다. 무엇을 요구하는 단식인가?"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죽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 희망을 만들려고 여기에 이렇게 진지를 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3번째 죽음이 찾아왔다. 이곳에 와서 6개월 만이다. 보통 쌍용차 희생자들의 죽음은 4개월을 넘기지 않고 이어졌다. 이곳이 23번째 죽음을 두 달 더 연장시킨 것이다. 올해 안에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희망퇴직자를 포함해 해고자, 무급휴직자 모두 더 많이 힘들어질 거다. 단식하는 것도 그 희망을 찾기 위해서다. 내 마지막 책무다."
그가 여기 대한문 분향소를 '희망의 장소'로 보는 것은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로 발생한 죽음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거론이 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초, 14번째 죽음부터다. 옥쇄파업에 참여하고 지부간부들과도 가까웠던 임아무개씨가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듯 휴대전화에 모든 번호를 지우고 자살했을 때, 평택 공장 앞에서 그의 동료들은 절규했다. 그 전부터 죽음이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지 않았다. 본격적인 싸움은 그때부터다.
처음에는 모든 투쟁이 평택에서 진행됐다. 해고노동자들은 공장 앞에 천막을 쳤고 평택 시내에서 구호를 외쳤다. 상복을 입고 상여를 매고 도로를 걸어도 봤지만 지역의 여론은 냉랭했다. 이미 옥쇄파업을 거치면서 공동체는 무너진 상황이었다. 그때 새로 당선된 김정우 지부장이 사람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한진중공업으로 향했던 희망버스가 그의 결심을 이끌었다.
- 투쟁 전술이 변했다. 평택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유가 있나?"우리가 한진중공업으로 천리길을 걸었다. 2차 희망버스가 가기 전이었다. 우리는 문제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한진이 정리가 됐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한진 노동자들은 희망이 보이게 된 거다. 우리도 미궁에 빠져 있던 길이 보였다. 희망버스를 우리에게 돌릴 수는 없을까. 그래서 '희망텐트'를 했고, 서울역에서 22명의 희생자들의 노제를 치르고 지금 이 자리로 왔다."
김 지부장은 "2012년 안에 반드시 희망을 줄 수 있는 게 나오지 않으면 또 무더기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며 "지금까지 투쟁해오면 함께해온 동지들도 인생의 생명줄을 놓을 수도 있겠다고 예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택은 여론이 안 좋았다, 여기 나오면서 일반 시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응원도 많이 받았다"며 "특히 공지영 작가가 '의자놀이'를 쓰고 난 후에는 지방에서도 찾아오고 발길이 늘고 있다, 해외에서 들어와 여기부터 들려 분향하고 가는 시민도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쌍용차 문제부터 해결하고 전태일 찾아가라... 그래서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