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색칠공부하다.혹 어머니가 그림에도 소질이 있나?
김순희
거실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 하며, 밀린 얘기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거실 구석에 있던 검정색 가방 하나를 꺼내 놓으신다. 남편과 난 무엇인가 싶어 가방 속을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거기서 책과 공책, 크레파스, 연필통, 정리해둔 파일 하나를 꺼내셨다.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는 한글공부, 일주일에 서너 번 마을 회관에서 한글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잠깐 배우다 만 한글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며 들뜬 표정의 어머니는 직접 쓴 공책을 펼쳐 보이며 자랑을 하셨다.
"이따 아이가, 글자 쓴 거 보고 선상님이 잘 썼다고 칭찬도 해줬다 아이가.""아, 그랬나. 좋았겠네. 정말 잘 썼네.""내가 이래뵈도 글자를 안 배워서 그렇지, 나도 하믄 잘 한데이.""맞다. 엄마가 머리는 참 똑똑하다 아이가. 우리가 다 엄마 닮았는기라. 그건 인정할게.""꽃 색칠도 하고 했는데, 재밌더라. 아, 그라고 엊그제는 석남사에 소풍도 댕기왔다 아이가.""와, 좋았겠네. 가을소풍도 다 가고.""그 짝에서 김밥하고 떡 하고 뭐 많이 다 준비해 왔더라."시골 어르신들을 위한 한글교실을 지원하는 곳에서 아마 소풍까지 다녀오기로 한 모양인데 아무튼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와 생기 가득한 얼굴이 예전엔 보지 못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어릴 적, 시험보고 와서 상기된 얼굴로 어머니한테 자랑하던 나의 모습이 불현듯 지나간다.
글을 배운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커다란 행복이자 소원이었음을 알기에 뒤늦게나마 시작하게 되어 다행인 마음과 다 끝내주지 못하고 결혼해버린 그때의 내가 미안해졌다. 비록 비뚤하지만 정성들여 쓴 흔적이 가득하고, 그 한자 한자를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 크레파스를 들고 꽃에다 색칠을 한 그림 역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얼마나 설레고 얼마나 즐거웠을지 보지 않아도 그게 다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