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아씨
고함20
- 정아씨가 활동한 유네스코의 '브릿지 사업'은 아프리카 지역의 풀뿌리 교육과 지역사회 발전을 돕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어요. 어떤 계기로 지원하시게 된거죠?"대학교 들어가서부터 자원봉사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굳이 국내에서만 활동해야 하나 싶어서,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됐죠. 당시에는 해외생활이나 해외봉사에 대한 동경도 클 때였죠. 그래서 졸업 하기 전에, 아무래도 전공이 교육 분야다 보니까, 교육 관련한 국제활동이 없나 찾아봤어요. 때마침 유네스코에서 교육봉사를 모집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원을 하게 된 거죠."
- 해외 봉사 가기 전에, 한국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청소년수련관 등에서 '방과후 교실' 교사를 한다든가, 학교 근처의 저소득층 가정 방문하는 일등을 꾸준히 꾸준히 했어요. 또 해외 봉사도 학교에서 단기로 보내는 건 갔다 온 적이 있어요. 활동을 계속 하다보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했죠."
- 혹시 무섭지는 않았나요? 낯선 나라에서 살아서 생활이 불편한 것은 그렇다쳐도, 정아씨가 가는 곳이 치안이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잖아요. "그때는 열의에 차있어서 보내만 준다면 열심히 할 것 같았어요. 제가 사실 그 당시에는 치안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갔거든요. 다행히 르완다는 군부세력을 기반으로 한 정부가 들어서서 그런지, 안전한 편이었어요. 외국인이니까 눈에 띄니까 표적이 될 수 있긴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한국만큼 치안이 괜찮은 것 같았어요."
- 르완다는 본인이 선택해서 가신 건가요?
"여섯개 국가 (남아공, 짐바브웨,잠비아, 내소토, 말라위, 르완다) 중에, 파견이 된 거예요."
-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있었나요?"르완다에는 세 명이 파견되는데 완전 따로 살아요. 지역도 멀기 때문에 같이 일할 수 없고, 혼자 일해야 해요."
- 르완다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지네요. 적응하긴 힘들지 않았나요?"저는 르완다 남부 무항가 지역에서 있었어요. 우리나라와 다르긴 한데, 생각보다 삶의 방식은 많이 다르지 않았어요. 날씨가 다르고, 사람들이 주로 농사를 짓는 게 다르긴 하는데, 우리나라도 예전엔 농사 많이 지었잖아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원시문화'가 많이 남아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나라에 전통문화가 남아있는 수준, 딱 그 정도예요. 물론 미신이나 주술사도 있는데 공공연한 장소에서 이야기 하진 않고요. 사람들이 기독교를 많이 믿으니까요.
아직 텔레비전은 많이 없어요. 전기보급율이 떨어지니까 텔레비전을 보기 보다는 라디오를 많이 듣죠. 그리고 국가가 주도해서 도로 정비도 하고, 초가집도 뜯고 있어요. 우리나라 60~70년대가 왠지 이랬을 것 같아요."
- 일종의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고 있네요."실제로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모델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이 새마을 운동 본부가 르완다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요. 유엔의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농촌 개발 프로젝트)에서도 새마을 운동을 비중 있게 다뤄요. '우무간다' 라고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주민들이 참여해야하는 공동노동 같은 것도 있어요."
- 르완다가 이제 막 도약하려는 국가인 만큼, 정아씨가 할 일도 꽤 많았을 것 같은데요."큰 사업을 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사는 지역 주민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하고자 하는 게 있으면 지켜보고 있다가 조언을 주거나, 직접 도와주기도 했어요. 주로 기존에 있던 활동을 지원하는 식이었는데요. 제가 활동이 다 끝나고 돌아간 후를 생각해서에요. 마냥 일을 제가 주도하다보면 제가 돌아간 이후에는 활동이 유지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기존에 있던 활동이나 사업에 지원을 해서, 그것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려고 했죠. 물론 상황에 따라 제가 주도하는 부분도 있었지만요."
-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나요?"시간이 부족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일을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일단 초기에는 사람들과 친해져야 하거든요. 그 적응 기간이 조금 걸렸어요. 적응이 된 다음에는 성인 문예교실 지원 사업이나, '아프리카의 날 행사'등을 추진했고, 가장 열심히 했던 건 '면 생리대 사업'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 1년간 학교 상담소에서 근로학생으로 일했거든요. 당시 학교 상담소에서는 면 생리대에 대한 교육을 했었고, 저도 거기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많이 배워놓은 상태였거든요. 제가 기존에 갖고 있던 관심사와 지식을 바탕으로 일단 시작을 해본거죠."
- 르완다에 생리대가 많이 부족한가요?"여성 보건이 아직 잘 되어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보건 교육은 시키지만 현실적 여건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죠. 공장에서 나온 1회용 생리대가 있어도, 그쪽 사람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하고 현금은 없는 편이거든요. 현금으로 사야 하는 1회용 생리대를 못 사서, 하루에 한 개 쓰고 그래요. 위생에 당연히 안 좋을 수밖에요. 또 환경문제도 생각을 했어요. 여기는 필요할 때마다 화장실이 될 만한 땅을 파서 쓰고, 한 곳이 꽉 차면 그냥 다시 흙으로 메꾸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생리대가 같이 땅에 묻혀지면, 생리대는 썩지도 않으니 토양이 오염될 수밖에 없죠.
그래도 물은 있으니까, 물을 가지고 빨아서 쓸 수 있는 면 생리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 거죠. 처음에는 재료비가 들겠지만, 일정수량만 가지고 있으면 바꿔가면서 쓸 수 있고 공장에서 만든 생리대를 사는 것보다 돈을 더 아낄 수 있으니까요. 또 이것을 많이 생산해 수익을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 쉬운 일은 아니었겠어요. 얼마 정도 지나니까 사람들이 면 생리대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던가요?"사실 실패도 많이 했어요. 면 생리대 사업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 번에 걸쳐서 했는데, 처음에는 취약계층 여성들 대상으로, 다음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마지막으론 지방정부의 협조가 따르는 수익사업으로 진행이 되었어요.
처음부터 저는 이걸 '수익 사업'으로 만들려는 목표가 있었어요. 그래서 지역 목사님에게 요청해서 40명 정도의 취약계층 여성 (싱글맘, 과부 등)을 모아서 가르쳤어요. 아주머니들이 열심히 참여하시고, 곧잘 만드시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자립의지는 없으셨어요. 제가 재료비를 지원했거든요. 그런데 처음 줬던 재료가 떨어졌으니, 재료를 더 달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수익사업을 원했던 건데... 소통이 안 됐던 거죠. 그래서 그 이후에는 교육 위주로 가보자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엔 지역 교장선생님을 통해 학교에 가서 교육을 하게 되었고, 2주 동안 4번, 180명에서 200명 가량의 학생들에게 면 생리대를 만드는 법과, 그 필요성에 대해 가르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