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5월 27일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연합뉴스
본 것을 봤다고, 들은 것을 들었다고,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시대도 시작됐다. 이 전 의원은 "그때는 길거리나 다방, 학교에서 감히 '유신이 진짜 옳은 거냐'는 말도 꺼내질 못했다"며 "항상 주위를 둘러보며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경찰이 있는지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유신 선포일부터 반년여 동안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973년 봄, '이렇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유신 반대 시위를 준비한다. 마침내 10월 2일 서울대에서 유신 선포 후 처음으로 유신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날의 뜨거운 반응을 본 이 전 의원은 전국 규모의 시위를 계획했다. 그 결과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 이름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유신 반대'를 외쳤다. 시위 자체는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깜짝 놀란 정권은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체포된 자만 1024명, 기소된 사람은 200명이 넘었다.
"수사관들은 '너는 짐승'이라고... 하도 맞아서 허위 진술서를 썼다"민청학련 사건 이후 고등학생으로 위장해 도망다니던 이 전 의원은 한 달여 만에 붙잡혔다. 수사기관에 끌려가자마자 그는 모든 옷이 다 벗겨진 채 맞았다. 그 시절 구타와 고문은 "모든 수사기관들의 공통점"이었다. 이 전 의원은 "(수사관은 끌려온 사람을) 인간 취급 안 한다"고도 했다. "수사관들은 '너는 짐승이야, 물이 필요하면 나한테 애원하고 밥이 필요하면 굴복해'라고 했다"며 "하도 두들겨 맞아서 허위 진술서를 썼다"고 말했다.
"김상협 당시 고려대학교 총장을 오가는 사람이 많은 광화문에서, 그것도 붐비는 오후 4시쯤에 만나 500만 원을 받았다고 말이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데, 수사관들은 그걸 소중히 간직하더라(웃음). 나중에 (정부가) 그걸 써먹진 않았다."이때 정부는 '민청학련이 국가를 전복해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했다'며 '민족지도부와 재일교포 적군파, 인민혁명당(아래 인혁당) 재건위란 배후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민족지도부'는 함석헌 선생과 윤보선 전 대통령이 꼽히는 등 모양이 그럴듯했다. 하지만 '재일교포 적군파로 지목된 다치카와 마시키는 이 전 의원과 동료를 인터뷰한 일본인 기자, 하야카와 요시하루는 통역에 불과했다. 인혁당 재건위로 붙잡혀온 8명도 사정은 비슷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노란 딱지를 수의에 붙인 채 독방에 있을 때였다. 감옥에서 청소하고 밥 나르는 수감자가 오더니 공범이 들어왔다며 '서도원'이란 분이라고 하더라. 잘 모르겠어서 어느 학교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58살쯤된 노인이라고 했다. '노인 없어, 우린 다 학생이야'라고 말했다. 그분이 인혁당이란 이름으로, 저희 배후로 지목된 서도원씨다. 이름을 들어보거나 만난 적도 없던 분이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완벽한 조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