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유신쿠데타 결심은 '천황 스타일'?

'유신 40년' 박정희는 왜 쿠데타를 일으켰나②

등록 2012.10.17 10:42수정 2012.10.17 10:42
0
원고료로 응원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초헌법적 조치를 발상하고, 상상하게 된 근원적인 동기 혹은 내면적인 유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어떤 행위는 그 행위주체의 '두뇌'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점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박정희가 유신체제 수립을 결심하게 된 동기 가운데 하나로 남북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든다. 즉, 박정희가 북한의 유일체제를 보고 본받았다는 것이다. 실제 이후락은 방북 당시 북의 정치체제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 평양을 다녀온 이후인 1972년 5월부터 유신체제 수립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후락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박정희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본다면, 이런 주장은 명백히 틀린 것이다(실제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당시 여권 내에서 개헌논의와 개헌작업이 시작된 것은 이후락의 방북 전인 1972년 4월부터였다고 한다. 즉, 시기적으로도 이후락의 주장은 맞지 않는 것이다).

전술했듯 박정희는 10·17 계엄선언문에서 민주주의체제의 골간이 되는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 바 있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민주주의체제를 '무질서, 비능률, 파쟁, 정략'이 판치는 체제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10월 27일 특별담화문에서도 역시 이 같은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반복하였다.

우리가 이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안정을 이룩하고 능률을 극대화해나가야 하며 이 모든 국력을 자율적으로 결집할 수 있는 국민총화를 유지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도리어 안정을 저해하고 비능률과  낭비만을 일삼아왔으며 파쟁과 정략의 갈등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것은 남의 민주주의를 미숙하게 모방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민주주의를 모방만 하기 위해 귀중한 우리의 국력을 부질없이 소모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중략)

나는 오늘 공고된 이 헌법개정안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중략) 민주주의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헌정생활의 규범임을 확신합니다.

또, 1972년 9월 12일 국무회의에서 내린 '지시사항'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이라도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세우고 몇 년 동안 계속 선전을 해가면서 국민을 강제로 끌고 나가는 것이 그들의 실정인데 반하여, 민주사회에서는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야당이 반대하거나 또는 정권의 수임기관 등에 불필요하게 신경을 쓰는 나머지 중도에 흐지부지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위 담화문에서 박정희는 "남의 민주주의", 곧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 혹은 혐오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그것을 모방하는 것은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괜한 국력 소모만을 초래할 뿐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 즉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 원리가 지켜진 시기(제3공화국 시기)마저도 '불안정', '비능률', '낭비', '파쟁과 정략'만을 일삼던 시기로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국력향상을 위해선 모든 면에서 안정을 이룩하고, 국민총화를 통한 능률의 극대화,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능률적인 목표달성을 위해 전체사회를 하나로 조직화하자는 주장인데, 이는 전체주의적, 파시즘적 발상이다.

그러면 박정희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위의 '지시사항'이다. 이에 나타난 그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면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세우고 몇 년 동안 선전을 해가면서 국민을 강제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사고가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그가 주도한 새마을운동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됐다. 또 박정희가 야당의 반대나 정권이 눈치 보는 것을 아주 싫어했음도 위의 자료에서 잘 드러난다. 이처럼 박정희에게 있어 민주적 방식은 전체주의적 방식으로 해결,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 스스로는 이러한 방식을 "민주주의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헌정생활의 규범"이라 표현했다.

박정희의 천황제 이데올로기 신봉과 파시즘적 사고방식

그러면 그가 이러한 전체주의적 신념 혹은 발상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궁극적인 배경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이는 '유신'이라는 말 자체에 해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박정희가 근대 일본 제국주의의 파시즘적 군국주의와 함께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깊게 빠져 있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는 일제 식민지 시기 만주 신경(장춘)군관학교 출신으로, '황국군인' 또는 일제 특유의 '파시즘적 군국주의'의 신념을 직접 '체득'한 인물이었다. 실제 그가 재학한 군관학교의 교관 중에는 2·26반란사건에 가담했다 만주로 추방된 인물도 있었고, 박정희는 그런 인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그런 탓인지 박정희는 평소 2·26반란사건을 동경했고,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신념화에 가까운 수준으로 수용했다고 한다. 만주군관학교 교장이 박정희를 두고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들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칭찬한 일화는 그 정도의 수준을 잘 말해준다. 한마디로 '뼛속까지 일본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이러한 천황제가 성립된 것은 명치유신 때부터였다. 자연스레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신봉한 박정희로선 명치유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그는 쿠데타 직후 펴낸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명치유신이 가져온 '성공적 결과'를 강조하며 "금후 (명치유신이)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또 1961년 12월, 일본 동경을 방문한 박정희는 자민당 간부들과의 모임에서 "마치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일본 지사들과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분들을 본받아 우리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발언했는데 여기서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신념이 무엇이었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박정희에게 있어 명치유신은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다.

하지만 명치유신을 계기로 성립된 천황제는, '신성불가침'의 천황에게 모든 권력과 권한을 집중한 것이었고 이는 뒤에 천황을 중심으로 전체 국민을 총동원할 수 있는 군국주의적 파시즘 체제로 이어졌다. 천황은 절대 권력이었고, 삼권분립과 같은 민주적 원리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정당정치, 의회정치는 부정되었다.

물론 일본에서도 한때 정당내각과 사회운동이 활기를 띤 시기가 있었다. 바로 '대정(大正)데모크라시'라 불리는 1920년대였다. 하지만 이때도 '감히' 천황주권에 도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허용되지 않고, 단지 '민본(民本)주의'라는 애매한 표현만이 쓰였다.

하지만 이조차도 1930년대 들어 부정되었다. 1936년 2·26반란사건을 일으킨 황도파는 말 그대로 천황을 군국(軍國) 일본의 구심점으로 받들며 '국가개조'를 내걸었는데, 여기에는 기성의 정치인과 재벌 등에 대한 강한 반감이 그들의 군국주의적 이상 및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과 결부되어 있었다.

물론 2·26반란은 결국 실패하고 황도파는 몰락했지만, 그 결과 이 시기 일본에선 거국내각이 수립되어 정당내각이 붕괴되었고 군부가 득세하게 된다. 이는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적 파시즘을 강화하고 전국가, 전국민을 조직화하여 총동원체제를 확립해 전쟁의 길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었다. 박정희가 말한 능률의 극대화, 조직화란 다름 아닌 이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서구식 민주주의의 골간을 이루는 의회정치,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극도의 혐오감 역시 바로 여기에 기원을 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에서 보듯 박정희는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 군국주의적 체제가 지닌 폭압성과 억압성에 대해선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특히 일제의 파시즘적 군국주의는 결국 침략주의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러한 침략주의의 대표적 피해자가 바로 한국이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주지하다시피 식민지 조선 민중들은 1930~1940년대 일제의 파시즘적 전시체제 아래에서 질식 상태에 놓여있었음에도, 박정희에게는 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었다. 어느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5·16쿠데타 이후 한국의 정치과정은 박정희의 이러한 생각이 차례차례 실행에 옮겨지는 과정이었다. (중략) (유신헌법으로 : 필자 주) 사실상의 1인 독재와 영구집권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거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절정은 긴급조치였다. (중략)

여기에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것은 천황과 황실에 대한 어떤 불경한 언행도 용납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일제의 패전을 입에 올리는 행위 자체를 중죄로 다스리던 일제 말기의 군국주의통치였다. 메이지유신에 의해 메이지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메이지체제가 성립되었듯이 10월유신에 의해 박정희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유신체제가 성립되었다.(이준식 <박정희의 식민지 체험과 박정희시대의 기원> <역사비평> 2009 겨울호, 251~254쪽)

결국 박정희는 10월 유신이 필요한 이유로 "민주주의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켜야" 하는 점을 들었지만, 그것은 토착화가 아닌 일제의 파시즘적 통치방식을 이 땅에 그대로 이식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무튼 박정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일찍부터 신념화, 내면화하고 있었고, 5·16쿠데타나 유신쿠데타나 그의 발상은 모두 여기서 출발한 것이었다. 혹자는 '10월 유신이 5·16의 완성이었다'고도 말하는데, 실제 박정희의 내면속에선 이 말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내면세계가 1970년대 초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조건과 결합되면서 결국 유신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박정희 #유신 #쿠데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4. 4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5. 5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