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20회를 맞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1897년 첫 대회에서 시작됐다.
김종길
들치기, 목치기, 머리치기, 밀치기, 뿔걸이, 뿔치기, 연타, 옆치기(배치기)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며 아찔한 상황을 맞으며 팽팽하던 접전은 연이은 공격에 한쪽이 꽁무니를 빼며 도망을 치면서 승부가 갈렸다. 이긴 주인은 결전을 잘 치러낸 싸움소가 그 어느 때보다 대견하고, 진 소주인은 애써 서운한 감을 감추고 덤덤하게 소를 끌고 나간다. 이때마다 관중들의 아낌없는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급기야 장내 아나운서의 한마디에 모두 괴성을 지르며 열광하게 된다.
올해 120회를 맞는 진주 전국 민속 소싸움 대회는 1897년에 첫 대회가 시작됐다. 특히 진주의 소싸움 대회는 일제 강점기에도 이어질 정도로 100년 이상의 전통과 박진감 넘치는 경기력을 자랑해왔다. 진주소싸움은 다른 지역의 소싸움에 비해 기록과 사진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팔월 추석 중에 남강의 백사장에서 소싸움이 벌어졌고 그 기원을 백제에 이긴 신라의 전승 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고려 말에 자연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의 소를 많이 잡아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설 등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민속놀이>는 소싸움이 줄다리기와 함께 진주 일대의 연중 큰 행사로 치러졌다고 적고 있다. <조선도읍대관> '진주편'에선 소싸움과 촉석루를 소재로 한 당시 우표의 스탬프 인장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 지방지의 효시인 <경남일보> 1909년 11월 23일자에는 주필이던 위암 장지연이 <진양잡영(晋陽雜詠)>이라는 소제목으로 진양(진주)을 노래한 것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농가의 8월에는 술 향기 번져나고/가을 곡식 드리운 꽃은 땅에 가득 누렇네/천고의 영웅들이 전쟁하던 이 땅인데/지금에 이르러 투우장이 되었구나"라는 시와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한데/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가 산과 같네/뒤엉킨 뿔싸움 다투어 충돌하니/제(齊) 나라 군대가 절묘한 승리로 묵적(墨翟) 군을 파하고 돌아오는 듯하네"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이곳의 투우가 심히 성하여 수많은 무리들이 크게 충돌을 부리며 그 등약(騰躍)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더라"고 적고 있다. "이미 남강 백사장은 일제강점기 시작 전부터 '수무바다'라고 일컬어 소싸움 때면 백사장에 수많은 차일(遮日)을 치고 진주 인근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