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의 돌사자
정만진
역사유적이나 문화재의 현장을 찾았을 때에는 안내판의 내용부터 꼼꼼하게 읽는 것이 기본이다. 문화재청이나 전문가의 안목이 드러나는 안내판이므로, 일반 답사자에게 핵심 내용을 알려준다.
이곳 괘릉에서도 안내판의 해설에 따라 무인석을 둘러보고, 돌사자의 표정도 살펴본다. 과연 그들의 웃음은 너무나 천진난만하여 저런 얼굴로도 왕릉을 지킬 수 있을까, 문득 의심스럽다. 하지만 안내판은 "이들(보물 1427호인 무인석, 문인석, 돌사자) 석조물들은 괘릉 봉토 주위의 12지신상과 더불어 8세기말 신라인의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적 감각을 웅변하여 주는 걸작"이라는 결론을 내려준다. 일반인들이 혹시 가질지도 모르는 의심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배려적 해설인 셈이다.
원성왕의 대표 업적 |
원성왕은 재위 4년(788) 봄,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는 관리 선발제도를 시행하였다. 독서삼품과는 논어, 예기 등등의 책에 통달한 수준에 따라 인재를 삼 등급으로 나누어 관리로 임용했다. 그 이전까지 활쏘기만으로 관리를 선발하였던 것에 견주면 이는 세상을 바꾼 개혁이었다.
또 왕은 재위 6년(790)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삼국사기는 16대 흘해왕(310∼356) 때 '처음으로 벽골제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저수지로 추정되는 벽골제는 지금의 김제시 부량면에 있으므로 처음 축조한 왕은 신라의 임금이 아니었다. 거대한 연못을 만들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주인공은 백제 11대 임금 비류왕(304∼344)이었다. 때는 그의 재위 27년인 3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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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의 주인인 원성왕은 왕위에 앉게 된 과정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임금이다. <삼국사기>는 그 전말을 이렇게 전한다.
혜공왕(765∼780) 말년에 반란이 일어나 왕과 왕비가 죽었다. 상대등 김양상이 앞장서서 반란을 제압했다. 김양상의 동생인 이찬 김경신도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김양상이 선덕왕이 되면서(780년) 경신에게 상대등 자리가 주어졌다.
5년 뒤 선덕이 아들 없이 죽었다. 신하들은 선덕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런데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던 주원은 마침 내린 큰 비로 알천이 넘치는 바람에 궁궐에 오지 못했다.
누군가가 "임금 지위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폭우가 내리는 것은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했다. 결국 경신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끝내 그림자를 보여주지 않은 무영탑(無影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