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왕릉. 경주에 있는 수많은 왕릉들 중 무덤 앞이 가장 인상적인 느낌을 주는 곳이다. 신라 말기의 어수선한 정치 상황을 암시하는 듯 정강왕릉 앞은 불쑥불쑥 땅위로 솟구쳐오른 나무뿌리들로 온통 어지럽다.
정만진
헌강왕은 예능에 재주가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삼국유사>는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 혼자서 보았다. 이때 왕 자신도 춤을 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에도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 등의 기록도 있다. 이를 두고 일연은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리려고 춤을 추어 경계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로운 일이 나타났다면서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겼으니 나라가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헌강왕릉 옆에는 그 다음 임금인 50대 정강왕의 무덤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동생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886년부터 887년이 그의 재위 기간이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죽으면서 남긴 다음 말이 실려 있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에 못하지 않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일을 본받아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삼국사기>는 정강왕이 죽으니 "보리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헌강왕도 "보리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강왕릉의 주소가 '경주시 남산동 산 53'이고 헌강왕릉의 주소가 '경주시 남산동 산 55'이니 삼국사기의 기록 그대로 형제는 나란히 묻혀 이승의 일을 모두 잊고 지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