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 바로 뒤에 있는 양산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양산재는 신라 6부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곳.
정만진
나정, 박혁거세가 출현한 곳일성왕릉에서 연못 옆을 돌아나와 35번 도로까지 나오는 길은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성지(聖地)다. 박혁거세가 알로 태어난 곳인 나정과, 혁거세 이전에 서라벌 땅을 다스렸던 6부 촌장들을 제사 지내는 양산재가 앞뒤로 붙어 있다.
삼국사기는 '(경주의 산골에 분산되어 살고 있던 사람들은 여섯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진한(辰韓)은 뒷날 신라의 땅이 된다. 진한은 백제의 땅이 되는 마한(馬韓), 가야의 땅이 되는 변한(弁韓)과 함께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삼등분한다. 이를 삼한(三韓)이라 하는데, 김유신이 죽기 얼마 전 문무왕에게 '삼한이 한 집안이 되었다(三韓爲一家)'고 말할 때의 '삼한'도 (내용상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키지만) 마한, 진한, 변한을 지칭하는 '三韓'에서 온 용어이다.
'신라'를 국호로 정한 때는 303년(지증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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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국호로 확정된 것은 지증왕 4년(303) 10월이다. 삼국사기는 신하들이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德業日新 網羅四方), 그것으로 나라 이름을 삼는 것이 마땅할까 하옵니다'하고 아뢰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 이름에 '사방을 망라한다'는 큰 뜻을 넣은 것은 이때부터 신라가 통일을 염두에 둔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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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왕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로 정했다. '아침해가 가장 일찍 환하게 비치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서라벌은 나중에 한자로 옮겨적으면서 서벌, 사라, 사로로도 불렸다.
삼국유사는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후세에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