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곳에 공룡 발자욱, 물 건너 천전리 서석이 보이는 풍경
정만진
진흥왕의 아버지 일행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기기 좋을 깨끗한 자리를 골랐을 터이다. 이미 원시인들이 여러 종류의 무늬들과 사람 얼굴 형상 등의 그림을 즐비하게 파놓은 혈암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그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지는 못했을 터이다. 서석 바위 앞 대곡천 너머에 펼쳐진 넓은 바위들 위에 움푹움푹 파인 원형의 무늬들이 공룡발자국이라는 사실도 물론.
두 번째 기록에 나오는 '(사부지 갈문)왕은 과거의 왕비 지몰시혜 비를 스스로 생각했다'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첫 번째 방문 때 함께 왔던 지몰시혜가 두 번째에는 함께 오지 못했으며,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여기까지 와서 왕이 죽은 부인을 '스스로 생각'했고, 그 사실을 바위에 글자로 새겨 남긴 것을 보면 그의 죽은 아내 사랑은 더없이 지순했던 듯하다.
하지만 진흥왕은 그저 신나게 물놀이만 하며 철없이 놀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서 '어리다'와 '철이 없다'는 거의 뜻이 같으므로, 아이는 '철'의 구분을 모르는 사람, 즉 시간 개념이 없는 존재이다. 병으로 혹은 자신을 낳다가 죽어 저 세상으로 간 어머니에게 주어진 '영원한 시간'을 여섯 살 철부지 심맥부가 어찌 알 수 있었을 것인가. 아이는 그저 왕과 왕후, 화랑과 낭도 들이 여름철마다 찾아와서 논, 신라 '상류층의 피서지' 대곡천에서 퐁당퐁당 물놀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리라.
그 어린 심맥부, 바로 이듬해인 540년에 임금이 된다. 뒷날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는 칭송을 듣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는 바로 그 진흥왕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