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릉
정만진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눌지왕(417∼458) 때다. 처음에는 묵호자가 일선군(경북 선산) 모례(毛禮)의 집에 왔다가 이윽고 궁궐에 들어가 왕녀의 병을 낫게 해주었고, 그 다음에는 아도가 역시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몇 해 동안 불교를 전파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이 나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차돈은 '신하와 백성이 나라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절개이자 의리'라면서,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한다. 이윽고 법흥왕과 입을 맞춘 이차돈은 '왕의 허락을 받아 절을 짓기로 했다'고 떠들면서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베었다. 천경림은 신라인들이 대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신령한 장소였다. 신하들이 강력히 법흥왕에게 항의했다.
법흥왕의 주요 업적 |
법흥왕은 재위 4년(517) 처음으로 병부(兵部, 국방부)를 설치했다.
재위 7년(520)에는 법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관리들의 관복을 제정하였는데, 붉은빛과 자줏빛으로 등급을 표시하였다.
18년(531)에는 처음으로 상대등(국무총리)이라는 벼슬을 두었다. 법흥왕이 상대등을 두었다는 것은 그 동안 화백회의를 통해 6부 촌장들이 만장일치로 국정을 운영해오던 데 비해 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화백회의 식의 귀족회의는 상대등에게 맡기고, 왕은 독자적으로 최후 결정만 하면 되는 지위로 올라섰던 것이다.
19년(532)에는 금관가야왕 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노종, 무덕, 무력과 함께 보물들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 544년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는 등 신라에 많은 공을 세운 셋째아들 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왕은 재위 23년(536),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왕릉 앞의 안내판은 병부 설치, 법령 반포, 관복 제정, 상대등 설치, 불교 공인, 연호 사용 등 법흥왕의 업적을 두고 '신라의 국가 체제를 정비'했다고 평가한다. 법흥왕이 상대등을 두었다는 것은 그 동안 화백회의를 통해 6부 촌장들이 만장일치로 국정을 운영해오던 데 비해 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화백회의 식의 귀족회의는 상대등에게 맡기고, 왕은 독자적으로 최후 결정만 하면 되는 지위로 올라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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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이 잡혀왔다. 왕과 신하들 앞에서 이차돈은 왕명을 받은 적이 없다고 자백했다. 이차돈은 죽음 직전에 '나는 불법을 위해 죽는 것이니 반드시 부처님께서 신이한 일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목을 베자 그의 머리는 소금강산 백률사 자리로 날아갔고, 목에서는 젖같이 하얀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 이후 불교를 헐뜯는 신하가 없어졌고,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였다.
법흥왕은 이차돈이 죽은 천경림에 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인 흥륜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 터를 닦고(527년) 나무를 크게 베었는데(535년) 절은 544년(진흥왕 5)에 완성되었다.
업적 대단한 법흥왕, 그러나 묘소는 조촐법흥왕의 묘소는 그저 조촐하다. 한때 호석들이 있었던 흔적도 보일 듯 말 듯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간소할 뿐이다. 안내판도 '크기는 다소 작은 편'이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왕은 지방 관원들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일을 허가했다.' 재위 25년(538)의 일이다. 그가 '너그럽고 후하며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표현이 사실임을 알겠다. 무덤을 크게 만들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을 시켜야 한다. 그래서 법흥왕은 이렇게 유언을 했을는지 모른다. '나의 무덤을 쓸데없이 크게 만들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