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홍보활동 민생복지상담단체 박람회
김철호
김철수씨는 어린 시절 충남의 한 중소도시에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의 이혼과 재혼 과정에서 외톨이로 자랐습니다. 김철수씨는 의붓아버지와 의붓형제 사이에서 가족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청소년기가 되어 그는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고, 모든 가족관계가 단절된 채 고아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김철수씨는 서울에서 이것저것 일용노동을 하며 눈 너머로 자동차정비 일을 배웠습니다. 그 후 전국을 떠돌며 작은 카센터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부산까지 내려가서 자동차정비공장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차량도색부서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김철수씨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도 좀 모으게 되었고, 장래를 약속한 여자 친구도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90년대 중반, 김철수씨는 자기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김철수씨는 그동안 모은 돈에다 카드대출 등 여기저기 빚을 내어 무허가 자동차도색공장을 차렸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자 친구도 3000만 원 정도를 투자했습니다.
김철수씨는 작은 카센터를 돌며 도색차량을 수주하는 영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 한파가 몰아치면서 사업이 휘청거렸습니다. 작은 카센터들과 거래도 끊기고 차량도색수리 대금도 떼이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철수씨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차량도색공장을 폐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색공장을 처분한 돈으로 빚을 정리하고 나니, 자신이 투자했던 돈과 여자친구의 출자금을 한 푼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그 바람에 여자친구와의 관계도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고, 김철수씨는 다시 홀로 전국을 유랑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철수씨는 오랫동안 반 노숙을 하며 전국을 떠돌았고 간간이 일용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김철수씨는 몇몇 중한 질환을 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도 못 가고 제때 치료를 못한 채 2007년경 대전으로 와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철수씨는 길거리에서 쓰러졌고 119구조 차량에 실려 충남대병원응급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김철수씨는 병원에서 수술 및 통원치료를 받으며 1000만 원이 넘는 병원비가 발생했습니다. 김철수씨는 급한 대로 신용카드대출을 받아 병원비를 충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질병은 수술과 병원 치료 후로도 별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김철수씨는 일용노동마저 할 수 없었고 카드빚만 점점 쌓여갔습니다.
도저히 살길을 찾지 못한 김철수씨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김철수씨는 몇 달 동안 병원과 약국을 드나들며 수면제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2009년 6월 충분한 수면제를 모았고 자살결행 날짜까지 잡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김철수씨는 버스를 타고 한적한 교외로 나가려다 대전역 부근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초여름 햇살이 유난히 뜨겁고 무더워서 무심결에 대전역 지하철광장으로 내려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새벽 홍보부스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튿날 새벽상담센터 문을 두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인파산면책은 금융자본주의 시장사회의 인간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