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살았던 월세방을 최근에 찾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개조했다지만 그래도 곧 쓰러질 듯 누추하기만 하다,
김학용
더욱 가관인 것은 이렇게 개조된 세면장은 옆방과 보일러와 기름통으로 막아놓은 것이 전부여서 샤워하는 소리는 물론 '쉬' 하는 소리까지 다 들릴 판이었다. 속수무책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옆방이 여대생 자매가 사는 방이라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옆방 사람 숨소리까지 다 들렸다. 아침이면 재래식의 '푸세식' 화장실에 아침이면 휴지를 손에 들고 화장실에 줄을 서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래도 참았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실망이 더 아플까봐.
어느 날, 퇴근하니 왠지 아내의 표정이 어색하고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다. 밥상을 차리며 아내는 별로 밥 생각이 없어서 안 먹는단다. 당신이나 많이 들라고 하는 아내에게 빨리 대답하라고 채근했다.
"응…. 주인아주머니한테 한 소리 들어서 조금 속상했는데… 근데, 지금은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밥이나 먹어, 어서…."알고 보니 또 집주인의 이상한 계산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상냥하기 그지 없던 주인아주머니는 돈 문제, 특히 공과금에 관해서는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기 일쑤였다. 공과금 한 번 밀린 적 없이, 때 맞춰 군말 없이 준 아내는 세입자 입장에서 공평하게 적용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오늘도 여지없이 묵살당했으리라.
계량기가 하나밖에 없는 것을 악용, 주인집에서 일방적으로 계산한 살인적인 수도세와 전기세가 '내일까지 주기바람'이라는 경고성 쪽지로 나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태어날 어린 생명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아냈다.
임신의 기쁨도 잠시, 4개월로 접어들면서 입덧이 부쩍 심해졌다. 견디기 힘든 입덧과 푸세식 화장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변비로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니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시달리는 아내를 바라보며 그저 "자기야,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무슨 소리, 난 당신만 있으면 돼~"라며 안기는 아내를 위해 웃어 보이는 나,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출산이 가까워오자 아내를 그 험한 곳에 남겨놓고 회사에 출근해 편히 보내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산후조리와 육아를 이런 곳에서 하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인근 주공아파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가장 큰 우선순위는 전세금 액수.
알아보니 가장 적은 평수(9평, 29㎡)로 1000만 원이면 올 전세가 가능했다. 중산층을 대변하는 상징인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욕실 딸린 아파트 진입이야말로 지금에 비하면 '호강'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퇴직금을 미리 정산하고 대출을 하고 현금서비스에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융통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일사천리로 계약한 9평 아파트... 아내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