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지는 그 절터도 보배롭지만 하얀 빛을 내는 모산재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더욱 황홀하다
김종길
절은 망하고 터만 남은 곳. 흔히 폐사지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영화롭던 옛 역사는 몇몇 석조물 따위에만 겨우 흔적을 드러내고 너르고 허허로운 절터만 남겼다. 그 헛헛함과 허무함에 때론 깊은 무상에 침잠해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보기도 한다. 사라진 것과의 대화. 자신을 응시하는 곳.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역설을 옛 절터에서 읽을 수 있다.
무던히도 다녔다. 강원도 양양 진전산지와 선림원지, 강릉 굴산사지,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 여주 고달사지. 충청도 서산 보원사지,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지, 경상도 경주 황룡사지와 분황사지... 이 많은 곳을 둘러보아도 영암사지만큼 강한 끌림을 주는 폐사지는 없었다.
대체 어떤 폐사지이기에 이토록 여행자의 마음을 잡을까? 여느 절터처럼 영암사지도 몇몇 흔적들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남아 있는 유물들이 워낙 탄탄하고 보배로워 잠시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절터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산재의 하얀 빛 화강암 바위산은 그 이름처럼 신령스럽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