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안교 쌓기
안양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이산)는 즉위하자마자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이 말은 당시 150년간 이나 권력을 쥐고 있던 막강한 노론 세력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사도세자(정조의 아버지)를 모함,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만든 노론 벽파는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비가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는 정조가 왕이 될 경우 자신들에게 복수하려 들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갈 때 어린 정조(당시 열 살)는 '아비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 영조에게 피눈물로 간청했다. 그 이후, 24세의 나이로 즉위할 때까지 정조는 끊임없이 암살 위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노론 벽파는 어린 정조를 세손에서 끌어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는 건 영조도 마찬가지. 영조는 노론 세력으로부터 손자(정조)를 지켜 내기 위해 10살이라는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아들 '효장세자' 장자로 입적시켜 놓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이런 그가 즉위하자마자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선언했으니, 노론 벽파 대신들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렸을지 알고도 남음이다.
정조의 선전 포고는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었다. 정조는 일단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홍봉한과 홍인한 형제부터 처벌했다. 이들이 노론의 영수이기는 하지만 정조의 외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발을 줄일 수 있었다. 또 영조의 계비인 정순대비 동생 김귀주도 몰아냈다.
그 뒤로도 정조는 집권 기간 내내 노론 벽파와 긴장 관계를 유지했고, 그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정조 집권 기간 내 몇 차례나 암살 시도가 있었다 하니 당시 노론들의 반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하지만 정조는 보통 임금이 아니었다. 노론의 위세에 위축되기는커녕, 재위 13년인 1789년 장헌 세자(사도세자) 묘를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27년이나 지난 묘소를 옮기는데 신하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았다. 노론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이건 사도세자가 거론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정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동시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1794년(정조 18년)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에 착수한다. 노론의 서울이 아닌 국왕의 서울, 그리고 백성의 서울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정조가 추진했던 왕권강화 작업의 핵심 사업이었다. 이렇게 해서 건립된 게 수원 화성이다. 말하자면 수원 화성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고 동시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정조의 꿈, 21세기 대한민국 꿈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