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은 민관 공동으로 지역발전을 이룬 모범도시로 인정받아 '2012년 아시아도시경관상’을 수상했다. 아시아도시경관상은 타 도시의 모범이 될 만한 우수한 성과를 올린 도시, 지역, 사업 등에 국제연합인간거주위원회(UN-HABITAT)와 아시아경관디자인학회 주관으로 지난 2010년부터 매년 수여되고 있다.
정민규
한국전쟁 당시 야밤에 부산항에 도착한 군인들은 크게 놀랐다. 이름조차 생소한 부산이란 도시에는 고층빌딩이 즐비했고 그 야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들은 다시 한번 놀란다. 그 휘황찬란했던 야경이 실은 산등성이의 빼곡한 판잣집들이 내뿜던 불빛이란 사실에.
지금도 부산의 어르신들은 이런 이야기를 추억삼아 하곤 한다. 전쟁통에 도시의 수용능력을 넘어서 몰려든 사람들은 닥치는대로 집을 짓었다. 그렇게 부산은 아기신발을 구겨 신은 어른의 발 마냥 어색한 도시가 됐다. 도시는 난개발의 표본이라 불러도 좋았고 재개발을 해야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리고 재개발은 자고로 아파트가 모범답안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을공동체에서 도시재생의 답을 찾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 감천문화마을이 그 대표적 사례다.
부산 감천마을에는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가 구부러진 골목길 마냥 얽혀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몰려든 피난민과 판잣집은 감천마을의 외형을 불려놓았다. 사람들은 비탈을 깎아 집을 짓고 그 집들 사이로 골목길이 만들었다. 때문에 지금도 마을의 골목길은 비좁고, 가파르다.
마을로 가는 길도 쉽지 않다. 감천마을로 가기 위해선 치솟은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자동차 엑셀레이터를 묵묵히 밟고 고불고불한 길을 오르고 있으면 엔진이 신음소리를 낸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은 편이다. 도심에서 가까운데도 1964년에야 마을 초입에 겨우 포장도로가 깔렸다.
가파른 오르막길만큼이나 이곳 사람들의 삶도 숨이 가빴다. 전쟁 후 모두가 가난했지만 유난히 가난했던 마을에는 고물장수와 넝마주이, 엿장수들이 모여 살았다. 산업화를 거치면서는 이곳을 '슬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럴수록 마을은 쇠락해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재개발 소리가 나왔고, 동의서가 돌기 시작했다. 마을은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