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은 재벌들의 새마음운동 러시가 이뤄진 해이기도 했다.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 대회 및 직장봉사대 발대식'이란 이름의 행사에 그룹 임직원들은 대규모로 참가해 '새마음'을 다짐해야 했다. 현대그룹 대회에서 그룹 임직원들을 격려하는 박근혜(위 왼쪽), 동아그룹 대회 후 그룹 간부들과의 간담회 모습(위 오른쪽), 두산그룹 행사에서 새마음갖기에 앞장설 것을 다짐받는 박근혜(아래 왼쪽), 쌍용그룹 대회에서 '우수 대원'에게 표창장을 수여하는 박근혜(아래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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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978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새마음운동 조직 건설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다. 전국 각 지역은 물론 중·고·대학생, 교사, 불교계, 직능단체 등 부문별로 방대한 규모의 조직이 구축된 것이다. 이제 '마지막' 조직 구축 대상은 재벌, 그들의 충성도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새마음을 다짐한 곳은 태평양그룹이었다. 1978년 11월 태평양은 새마음 결의 실천대회를 열고 직장봉사대를 출범시킨다. 그 다음은 현대그룹. 1979년 2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에는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현대그룹 14개 기업체 임직원 6100여 명이 참가했다고 전한다. 상공부 장관, 건설부 장관, 동자부 장관도 참석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의미심장한 축사를 한다. "사회의 잘못된 점, 불편한 점, 어두운 면들을 불평하고 한탄하기에 앞서 그 어두움을 환하게 하는데 한 몫의 책임을 진 내 마음의 불은 잘 들어오고 있는지 살펴보는 자세가 새마음갖기의 첫 걸음"이라고 한 것이다.
1978년 3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똥물을 얻어맞으며 공장 밖으로 강제로 쫓겨났다. 72명의 여성 노동자가 연행됐으며, 그 과정에서 50여 명이 졸도했다. 현대그룹이 새마음을 '다짐'한 6개월 후에는 YH 투쟁이 일어난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실상 '불평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박근혜의 '새마음'을 재벌들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새마음 러시'가 이어졌다. 1979년 5월 동아그룹이 현대그룹의 길을 따랐고, 1주일 후에는 역시 두산그룹이 새마음직장봉사대를 띄운다. 10.26 사건 직전에는 대농그룹과 쌍용그룹이 각각 새마음갖기결의실천대회를 연다. 그야말로 새마음으로 '정경유착'이었던 셈이다.
새마음운동, 만약 10.26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