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고개(목판화 1982)
김봉준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북미 원주민들의 땅에 이르기까지, 그의 길은 멀고 아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숲 속의 나무 한 그루에, 허공을 가로지르는 바람 한 줄기에, 강가에서 살아가는 새 한 마리에, 발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에 깃들어 있는 영혼들을 만난다. 그 영혼들은 모두가 아득한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그는 그 이야기들에 천천히 물들어갔다.
제이 그리피스는 오스트레일리아 그레이트샌디 사막을 그린 두 장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 장은 유럽인이 그린 지도인데, 아무런 특징도 없고 색도 없는 단조로운 지형으로 묘사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똑같은 장면이 원주민 예술가들의 그림 속에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알록달록한 빛깔과 움직이는 생명, 그리고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허하거나 빈 공간, 혹은 황무지의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빈 공간'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만이 생명의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사막의 모래밭에서 살아가는 도마뱀 한 마리에까지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곳은 온갖 놀라운 것들로 가득한 생명의 땅이다.
김봉준은 그 순례의 길에서 그러한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만났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과 책 속에 담았다. 아니, 그뿐 아니다. 그는 실제로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먼 길을 떠나 마을 사람들을 위해 불을 구해오거나 곡식의 종자를 찾아온 용감한 청년처럼, 그는 자신이 순례 길에서 만난 영혼들을 진밭마을로 모시고 왔다. 그리고 그곳에 신화와 세상 모든 것들의 영혼이 만나 공생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합리적 이성주의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대극을 통합하는 신성한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