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진시내 풍경
신은미
"장마당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겼나?"
"장마당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용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러니 규모도 아주 작았습니다. 인민들도 '충분히 배급 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다고 장마당까지 가서 물건을 사느냐'며 장마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또 국가에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장마당은 저절로 없어질 테니까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규모가 커지게 된 겁니다.""규모가 커졌다면, 동시에 배급이 그만큼 안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요즘은 기업소마다 스스로 해결해야지 예전처럼 국가가 무조건 다 챙겨주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도 이익금의 30%를 국가에 내고 나머지로 봉급 주고 농산품 등을 구입해 자체 배급하곤 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장마당을 리용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된 지 꽤 됐습니다.""여기 장마당은 큰가?"
"글쎄요... 어느 정도를 크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저 하루에 이용객이 만 명 정도입니다."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여기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루 이용객이 1만 명이라면, 1주일에 7만 명이 이용한다는 것과 같다. 1주일에 장을 한 번만 본다고 가정하고, 한 가구당 식구를 네 명이라고 했을 때 라진의 장마당은 28만 명에게 생활필수품을 공급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순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 장마당의 대부분은 상인들이 양동이에 물건을 담아 길거리에 쭉 늘어앉아 팔고 있는 곳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빈민굴 같은 모습이었는데 하루에 1만 명을 수용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장마당으로 향했다. 문호영 안내원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준다. 하도 친절하게 이야기하길래 주의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까웠다.
"저... 선생님, 그리고 여사님. 사진은... 좀 부탁드립니다. 저도 찍게 해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카메라를 아예 놓고 갈까요?"
"에이,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카메라를 메고 가셔도 되는데 사진만은 좀..."
"그럼요. 걱정 마세요, 안 찍을 테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초라해 보이는 골목 시장... 이게 전부가 아니었네우리를 태운 승합차가 장마당 입구인 듯한 곳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자동차가 못 들어가게 돼 있단다. 장마당 입구는 내가 인터넷에서 본 것과 아주 흡사했다. 다만 규모가 훨씬 크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또, 물건이 담겨 있는 양동이는 인터넷에서 본 것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어떻게 저걸 머리에 이고 나왔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 규모의 장마당이 하루에 1만 명을 수용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 같았다. 나는 문 안내원에게 물었다.
"이 시장을 하루에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용한단 말인가요?""네. 어떤 때는 만 명도 더 된다고 합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골목에 만 명을 수용한단 말이에요?""아, 여기는 그저 입구입니다. 사실은 여기는 시장이 아니고 길거리입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실내와 실외로 구분돼 있는 시장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려면 자릿세를 내야 해서 돈을 내기 싫은 사람들이 이곳 길거리에다가 물건을 진열해 놓고 파는 겁니다."그 말을 듣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본 이 골목이 시장의 전부였다면 무척 가슴 아픈 일이 될 테니까.
입구서부터 북적북적한 것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장마당 입구 도로변을 따라 자리를 잡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주로 할머니나 아줌마들이다. 그들은 문 안내원의 어머니처럼 집에서 소일거리로 만들었거나 재배한 야채·푸성귀·떡·감자나 고구마 삶은 것·각종 음식·생선류 등을 팔고 있다.
자세히 보니 물건을 팔기만 한다는 것보다는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 사람 지나다니는 것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러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부부가 지나가니 "하나 먹어보시오"라며 수줍게 떡을 건네기도. 어린 시절 엄마 따라 시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문 안내원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그러지 않아도 찾아보면서 걷고 있는데, 오늘은 안 나오신 것 같습니다. 매번 저 자리에 계셨는데 안 보이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문 안내원이 어머니가 늘 계시던 곳을 손으로 가리킨다. 도로변을 조금 지나가니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 벽지가게·타일가게·장판가게·목공소·철공소 등등. 주로 전문적인 물품을 다루고 있는 상점들이다. 그곳을 지나치니 또 다른 입구가 나온다. 장마당 입구인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마디로 굉장하다. 예전 서울의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정도의 크기로 보인다. 물론 수준도 예전 한국의 시장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래도 이 정도 시장이 북한에 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싶다.
장마당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실내에 먼저 들어갔다. 모든 연령층의 옷가지를 비롯해 운동화·구두·갖가지 액세서리와 전기·전자 상품들, 그리고 화장품과 주방 도구·침구·귀금속·휴대전화 액세서리까지... 없는 게 없다. 입이 떡하고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장마당 안에 있는 제품 대부분은 중국산이다.
화장품 가게가 모여있는 코너를 둘러보며 지나가는데 한 아가씨가 애타게 우리 일행을 부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갔다.
"손님께서는 다른 곳에는 주름이 전혀 없는데 눈가에만 주름이 조금 있네요. 눈가 주름만 없으면 20대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오늘 아주 좋은 '주름 펴는 크림'이 들어왔는데 하나 구입하시라요." 장사 수완이 대단하다. 어떻게 내 약점을 단번에 짚었는지... 아가씨가 권하는 제품이 어떤 건지 보니 미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아이크림이다. 뒤에 중국어가 적혀 있는 종이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을 통해 북한에 들어온 것 같다. 하나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에 "이 화장품은 미국 제품이네요... 저는 미국에서 왔거든요. 그러니 미국제품 말고 조선 화장품을 하나 보여 주시겠어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나라의 질 좋은 인삼을 넣어 만든 제품"이라며 북한 화장품을 보여준다. 나는 흔쾌히 그 제품을 샀다.
돈은 인민폐로 지불했다. 상인들에게 가격을 물어보면 아예 인민폐 단위로 말해준다. 화폐교환소가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민폐를 주고받는다. 종종 북한 화폐로 거래하는 사람들도 보이긴 하지만. 그런데, 화장품을 사고 있는 동안에 문 안내원과 남편이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장마당에서 산 '붉은 별 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