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영 안내원
신은미
이런저런 생각으로 우울해져 있는 내 마음을 문 안내원이 전환시켜줬다. 여자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부드럽고, 다정한, 상대의 애간장을 녹이는 다정다감한 말투로 통화를 나누고 있다.
"여자 친구인가 봐요?""네, 곧 결혼할 사람입니다.""여자 친구는 뭘 하시는 분이세요?""의사인데, 제가 보기에도 진정으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의사란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 어머님께 효성이 대단합니다. 그 점이 제일로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집사람이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지요. 어머니께만 잘하면 저는 뭐래도 괜찮습니다."젊은 사람이 참 효자다. 휴대전화에 있는 여자친구의 사진을 보니 예쁘고, 얌전하고, 성실하게 생겼다. '남남북녀'라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북한에는 정말 예쁜 여성들이 많다. 평양에서 성형수술을, 그것도 쌍꺼풀 수술을 한 여성들을 보긴 했지만, 그들은 소수였다. 대개 천연 미인들이다. 게다가 하고 다니는 모습들이 성실하고 정숙해 보인다. 화장법만 약간 달리한다면 남한의 여성들과 비교했을 때,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남편이 라진-선봉에 온 기념으로 신선한 해산물을 점심때 먹자고 제안한다. 마침 점심 식사를 할 식당 근처에 수산물 가게가 있어 그곳에 들러 몇 가지 해산물을 사 식당에 가서 요리해 먹기로 했다.
해산물 가게 앞으로 도로 공사가 크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한참을 걸어서 가야만 하는데 괜찮겠냐고 문 안내원이 묻는다. 오히려 동네 구경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이곳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골목길을 걸어 주택가로 접어드니 마치 우리도 이곳의 주민이 된 것마냥 이들의 마주하고 있는 일상에 하나가 됨을 느낀다. 예쁜 구두를 신고 비포장도로를 조심조심 걷는 아가씨도, 진흙탕에 빠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가며 걸어가는 여학생들도,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지고 마음이 급했는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주머니도, '첨벙첨벙' 일부러 흙탕물을 튀기면서 신이 나 있는 장난꾸러기 아이들도... 모두 내가 살아온 지난 시절의 정겹고 익숙한 모습들이다.
집집마다 자그마한 텃밭에는 각종의 야채를 심어 놨다. 문 안내원의 집 앞마당에도 텃밭이 있는데, 어머니가 야채를 길러 장마당에 가져다 파신단다. 문 안내원이 어머님께 '이제는 아들이 편히 모실 테니 집에서 쉬시라'고 아무리 말려도 "집에서 쉬면 되레 몸에 병이 생기니까니 운동 삼아, 재미 삼아 장마당에 나가서 사람구경도 하고 얘기도 나누는 게 더 좋다'라고 하시며 매일 장마당에 나가신다고 한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정신없이 동네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산물 가게 앞에 와 있다. 가게 안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싱싱한 해산물을 고르고 있고, 옆에는 안내원으로 보이는 이가 통역을 하고 있다. 우리처럼 이들도 해산물로 점심 식사를 하려나 보다. 우르르 들이닥쳤던 중국 관광객들이 나가고 나니 해산물 가게 안에는 금세 적막감이 돈다. 우리 부부는 살아있는 대게와 해삼·멍게·소라 등을 샀다. 이곳에서 해산물을 파는 아가씨들이 먼저 말을 건넨다.
"오마야, 우리 말을 하시는 것을 보니 동포이신가 봅니다. 어디서 오셨나요?"
"미국에서 왔어요."
"주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데, 우리 동포분들을 뵈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해외동포들은 많이 오질 않는가 봐요?"
"재일동포들이 좀 오고, 가끔 재미동포들도 오기는 오는데 워낙 중국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까... 맛있는 해산물 많이 많이 드시고 가십시오. 저희들이 최고로 좋은 것들로 골라 드리갔습니다."세 아가씨가 "이것이 더 좋아 보이지 않네?" "아니, 그것은 어제 들어온 거야"라며 정성을 다해 해산물을 고른다. 조금 전 중국 사람들에게 할 말만 몇 마디 던졌던 아가씨들의 모습이 아니다.
동포라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정이 솟아오른다. "함께 사진 찍자"고 하니 금세 머리를 다듬는다. 밝고 명랑한 우리네 젊은 딸들임이 분명하다. 이들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처져있던 내 마음에 힘이 솟는다. 남이든 북이든 젊은이들의 생기발랄하고 당당한 모습 속에서 남북의 미래가 밝게 잡히는 듯하다. 내 마음에 생기가 흐르니, 비릿하게 느껴졌던 해산물 냄새가 싱그럽고 달콤한 냄새로 바뀐다. 해산물 냄새에 입맛이 돋는다.
"다시 또 만나자"며 수차례 인사를 되풀이한 뒤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자동차로 걸어왔다. 그새 되돌아오는 길이 익숙해진다. 문 안내원과 남편보다도 훨씬 더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어왔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동해, 이젠 다르게 느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