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준공식(1973. 7. 3)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뒷줄 왼쪽)
정부기록사진집
결국 1963년부터 추진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는 제철소 건설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차 5개년계획을 구상 중이던 1965년 5월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한 길에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둘러보고는 다시 제철소 건설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귀국하자마자 박 대통령은 박태준 당시 대한중석 사장을 찾았다. 박태준은 7세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 일본어가 능통한데다 와세다대학 기계공학부에 다닌 인연이 있어 '주체세력' 가운데 거의 유일한 일본통이었다. 박 대통령은 박태준을 통해 일본 쪽을 두드려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당시 한일관계의 막후 인맥인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였다. 오노는 박 대통령 취임 축하사절로 방한해 "자식의 성공을 보는 아버지의 기쁨을 느꼈다"는 망언을 했던 인물이다. 박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오노를 만나 길을 찾아보라고 '특명'을 내렸다.
"오노 부총재가 지금 시점에서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네마와시(根回, 나무를 옮겨 심기 위해 주변을 파서 잔뿌리를 쳐내는 일, 사전 정지작업이란 뜻)'가 중요하다고 하더군. 그걸 하기 위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적합한 인물의 조건을 얘기하는 데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임자는 임자밖에 없어."오노가 밝힌 '적합한 인물'이란 '박 대통령이 신임하고 의중도 잘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통역 없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라면 당시로선 박태준이 유일했다. 결국 박태준이 박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일본이 야하다 제철을 지을 때 채산성을 따졌는가?"일본으로 건너가 오노 부총재의 후원을 받아 8개월간 일본 내 정재계 인사들을 두루 접촉한 박태준은 귀국해 박 대통령에게 가와사키(川崎) 제철소의 니시야마(西山) 사장이 일본 철강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얘기를 전해주면서 조언을 받을 것을 권했다.
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한 니시야마 사장은 울산, 포항 등을 둘러 본 뒤 "한국이 발전하려면 제철소를 가져야 합니다. 철광석을 수입하기 위해 바닷가에 공장을 지어야 하고, 규모는 적어도 50만 톤에서 100만 톤은 되어야 채산이 맞습니다"라고 조언했다. 직후 박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제철업을 맡을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철강조사단 파견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965년 9월 일본 철강회사들이 연합으로 구성한 조사단이 방한하여 3주간 머물면서 포항 등을 둘러보고는 '100만톤 규모 제철소 건립'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듬해 7월 경제장관회의에서 이를 토대로 제철소 건설을 제2차 경제개발5개년사업의 '전략사업'으로 결정했다.
사업이 진행되는 중에 혼선도 없지 않았다. 제철소 건립을 미국 3개사, 일본 3개사, 독일 2개사 등 8개 회사 연합체에 위임하기로 했는데 경제기획원에서 '미국 회사인 코퍼스를 중심으로 구성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 철강협회가 불참을 선언하면서, 일본을 빼고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등 4개국 회사가 만든 연합체가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다.
KISA와의 협상 끝에 1967년 7월 포항이 제철소의 입지로 결정되었고 그해 9월 대한중석이 종합제철사업의 주체로 선정되었다. 이어 이듬해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제철이 창립되었고 그해 10월 3일, 포항 영일만 해안가에서 포항제철소 기공식이 열렸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제철소 건설비 마련이었다. KISA는 선뜻 자금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세계은행의 한국 담당자인 영국인 자페는 포철이 경제성이 없다고 본 것이었다. 결국 박태준은 1969년 1월 KISA의 모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 한국의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설명했지만 차관을 조달하는 데 끝내 실패하였다.
자금 지원을 못해 미안해하던 포이 회장은 박태준에게 하와이의 고급콘도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했다. 할 수 없이 이곳에서 며칠 휴식을 취하던 박태준은 우연히 포철 건설자금으로 대일청구권 자금을 떠올렸다. 이른바 '하와이 구상'이 그것이다. 당시 8000만 달러 정도의 대일청구권 자금이 남아 있었는데 문제는 '용처'였다.
박태준은 앞서 안면을 터둔 양명학자 야스오카(安岡正篤)와 미쓰비시 상사 후지노(藤野) 사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제철 사업인 만큼 일본정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철강업계를 먼저 설득해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 정부, 그 중에서도 통산성의 오히라(大平) 장관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는 김종필과 함께 '김-오히라 메모'로 한일 청구권 협상을 타결 지은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박태준 일대기 드라마? '박정희 찬양' 불보듯 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