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꿈을 찾아 나선 장보고의 후예들

산둥반도에서 우리민족의 꿈을 보다

등록 2012.09.06 09:53수정 2012.09.0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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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주수성 봉래각에서 내려다 본 등주수성
등주수성봉래각에서 내려다 본 등주수성송진숙

이번 장보고 유적 답사에 선발이 되었다. 예전에 1번 신청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어서 한동안 접고 있다가 이번 여름에 신청한 것이 운좋게 선발이 된 것이다. 연수 시기가 마침 방학 끝날 무렵이라 시간상으로도 적기였고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되어서 기대가 컸다.

이번엔 제대로 보고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자료는 물론 사진까지 찾아서 나름 공부를 했다. 그런데 장보고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거의가 중국인의 상혼으로 가득차 있는 관광지일 뿐인 듯했다. 좀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출발하기 전 준비를 제대로 했다. 출발하는 날 한국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혹시 배가 못 떠나는 게 아닌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속담에 일이 안 될려면 처녀가 시집가는 날 등창이 난다고 하더니. 이 무슨 폭우람! 사실 배타고 가는 것도 처음이어서 배멀미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다행히 주최측에서 개별적으로 전화를 해줄 때 물어봤더니 크게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해서 걱정이 줄어들기도 했다.

혹시 큰 비로 인천가는 길이 막혀서 늦게 도착해, 나만 못 떠나는 게 아닐까 불안해 집안 식구를 채근해서 일찍 출발했더니 여객선터미널에 3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공항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고 구경거리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시간이 되어 주최측에서 인원점검을 하고 자료를 나눠주는데 감동. 책과 자료와 모자까지 나눠주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모자를 쓴 모습들을 보니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성물을 찾으러가는 고고학자들처럼 보이는 것이 나쁘진 않았다. 승선 수속은 비행기 탑승과는 달리 간단한 편이었다.

캐리어도 가지고 들어갈 수 있고 좀 편안했다. 4인1실이었다. 배는 낡았지만 낡은들 어떠랴, 살림 차릴 것도 아닌데... 늘 그렇듯 이내 구성원 탐색에 나섰다. 민증을 '까고' 막내를 뽑아 총무를 시키고 그 많은 세월 살아온 경험으로, 마치 예전부터 만나온 사람들처럼 낯가림없이 얘기꽃을 피우며 첫날부터 화기애애함을 보였다.

2일째지만 답사 첫날이 시작되었다. 성산두라고 하는 중국의 가장 동쪽에 자리 잡은 곳을 찾았다. 햇볕은 쨍쨍 쬐는 가운데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자유로움, 유적지 답사라는 설레임이 있어 따가운 햇볕도 두렵지 않았다. 진시황의 수레와 거대한 동상들이 세워져 유적지라기 보다는 관광지라는 느낌이 컸고 중국의 상술이 놀라울 뿐이었다. 원래 성산두에는 진시황과 관련된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성산두 진시황이 불로장생초를 찾으러 동쪽으로 나아가다가 육지가 끝나서 아쉬워했다는 전설이 있다
성산두진시황이 불로장생초를 찾으러 동쪽으로 나아가다가 육지가 끝나서 아쉬워했다는 전설이 있다송진숙

하나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가다가 더 이상 가지 못해 아쉬워했다는 전설이고, 또 하나는 서복이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장생초를 구하러 갔다가 못 구하고 돌아와서는 진시황이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상어가 지키고 있는 탓에 못 구했다고 하자 진시황이 100만 대군을 데리고 와서 상어가 사는 방향으로 세 발의 화살을 쏘았다는 전설이다. 서복이 불로장생초를 동쪽에 있는 동이족에게서 구하려 했다는 전설은 산둥반도와 한반도는 일찍부터 깊은 관련이 있었음과 한반도와 서남해 연안과 발해만 황해 연안을 따라 일찍부터 항로가 열렸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산두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한나라 무제가 육군과 수군을 동원해 조선을 치면서 제사를 지냈고 당나라의 소정방은 13만의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기 위해 이곳에서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 진시황의 수레를 끄는 말이 한반도로 향하게 해놓은 것 역시도 중국의 욕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제경공 순마갱 제나라 경공의 묘지에 순장된 수레와 말들
제경공 순마갱제나라 경공의 묘지에 순장된 수레와 말들송진숙

산둥반도 최북단에 위치한 봉래는 옛날 바다 가운데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산인 봉래산, 영주산이 있었다고 하는 만큼 도교의 성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당나라 대는 봉래진으로 불렸다가 등주로 바꿔 불렀다 한다. 봉래의 북쪽 해안가에는 옛 등주항이 있다. 봉래는 산둥성에 위치한 여러 항구 중에서도 한반도와의 교류가 활발하였던 항구란다.

등주는 우리 역사와도 관련이 많은 곳이다. 612년과 645년에는 고구려를 치기 위한 수나라와 당나라 수군이 이곳에서 떠나기도 하였다. 732년에는 발해의 장군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등주성을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살해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당나라 때 등주는 평로치청절도사의 지배를 받았고 8세기경에는 평로치청절도사였던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가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를 맡아 신라와 발해의 교역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봉래를 중심으로 한 등주 일대는 많은 신라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이후 고려와 북송의 교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등주항은 바닷가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항구지만 묘도군도와 이어지는 산둥반도의 최북단에 자리하였던 지정학적 조건 대문에 일찍부터 성을 쌓아 수군의 요새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주수성은 명나라 때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비교적 완벽한 해상군사방어체제를 형성하였다. 명나라 말(末)에 왜구를 섬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척계광은 바로 등주 출신이었고, 척가군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등주는 중국 수도로 가는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한반도의 여러 나라가 중국을 공격할 때 처음으로 공격하는 대상으로 주목되기도 했던 곳이다.

등주수성 봉래해변에서 바라본 등주수성의 모습
등주수성봉래해변에서 바라본 등주수성의 모습송진숙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등주항은 모래와 흙이 많이 쌓이면서 수심이 얕아져 큰 선박이 정박할 수 없게 되자 등주항과 등주수성의 군사·정치·교통의 역할은 약화되었다. 요즘은 도교의 성지로 해안 절경을 조망하기 위한 관광지로 변화하고 있다. 사실 이번 답사 중 풍광으로는 으뜸이라고 꼽는다. 개인적으로는. 봉래각에서 내려다보는 등주수성과 봉래해변을 바라보는 눈맛이 시원했다. 이번 답사에서 이곳 한 곳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고 하면 과장일까?
                         
3일째 치박에서 제경공순마갱과 제나라 역사박물관을 관람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제나라 경공의 묘지 안에 말을 순장한 것도 호기심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게 제나라역사박물관 전시였다. 제나라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전시물들을 열심히 보고 있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시계방향-성산두, 제나라역사박물관 한국어해석오류, 적산명신상,오악지존 성산두는 호운각이라 바꾸어 놓았다. 박물관의 해석오류로 동이족을 원본동이족으로 춘추전국시대를 봄가을시기로 번역해 놓았다. 적산법화원의 적산명신상, 오악지존은 중국 5대 명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태산이 으뜸이라는 뜻.
시계방향-성산두, 제나라역사박물관 한국어해석오류, 적산명신상,오악지존성산두는 호운각이라 바꾸어 놓았다. 박물관의 해석오류로 동이족을 원본동이족으로 춘추전국시대를 봄가을시기로 번역해 놓았다. 적산법화원의 적산명신상, 오악지존은 중국 5대 명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태산이 으뜸이라는 뜻. 송진숙

유물에 대한 해설이었다. 우선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 해설이 있었다. 한국어 해설이 특이했다. 상나라 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상의 부족은 본시 동이족의 한 갈래이다'라고 설명할 것을 '상부락은 원본동이족이다'라고 설명해놓고, 시기구분에 있어서도 '춘추전국시대'를 '봄가을시기'라고 해설해놓았다. 어이가 없었다. 웃어야 할까? 일본어 해설은 없는데 한국어 해설을 해놓은 것에 있어서는 한국의 국력을 보여주는 만큼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일이겠지만, 이런 엉터리 번역은 고쳐져야 하지 않을까? 보면서 '우리의 국력이 이 정도구나'라고 자부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닌 듯했다. 다음엔 고쳐져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아쉬움과 씁쓸함을 안고 관람을 마쳤다.
                  
4일째 되는 날 청주박물관을 찾았다. 이번 답사 주제가 장보고 발자취를 찾아서인 만큼 산둥성에서 장보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 중에서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이곳 청주다. 산둥성의 중북부에 위치한 청주는 오래된 도시로 황하강의 하류로써 산둥반도 동쪽의 여러 항구와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산둥반도와 관련있는 인물 중의 하나가 이정기이다. 이정기는 고구려의 후예로 당나라 때 사조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765년부터 본격적으로 산둥 일대를 지배하였다. 이정기 일가는 당-신라- 발해- 왜를 오가는 모든 교역을 총괄하는 '해운압신라발해해양번등사'를 맡았다. 자연히 신라와 발해의 사신과 장인은 이정기의 허락을 얻어 교역활동을 펴나가야 했다.

이정기는 발해의 금, 은, 동은 물론 산둥성의 농산물과 소금을 독점거래하고, 조운까지 관리하게 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때로는 당나라에 협조하고 때로는 당 황실에 대항하면서 세력을 유지하였고 손자인 이납은 782년 새로운 나라인 제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거세진 당황실의 진압과 주변 절도사들의 반발로 819년 패망했다. 우리 민족이 중국땅에서 약 반세기동안 세력을 형성하고 한나라를 일으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로나마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역사의 아니러니였다.

적산법화원의 분수쇼 하루에 몇 번씩 적산명신상 분수쇼가 벌어진다
적산법화원의 분수쇼하루에 몇 번씩 적산명신상 분수쇼가 벌어진다송진숙

이때 장보고는 서주 무령군에 속하여 제나라를 진압하는 데 참여하였고 그 공으로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장보고는 이정기 이후 당, 신라와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활동을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이정기가 산둥 일대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재당 신라인·고구려인·백제인을 아울러 당 황실에 대항한 반면, 장보고는 정치적 색채를 일절 내세우지 않은 채, 이정기가 구축한 조직을 토대로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한 셈이다.

만약 장보고가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이납이 세운 제나라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없다고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보는 것도 청주지역 답사를 하면서 의미있던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답사를 하며 과거를 거슬러 고조선에서 신라 발해로, 때로는 고려로 시간여행을 하는 즐거운 가운데 마지막 5일째가 되었다. 처음 도착했던 석도진의 장보고 유적지 적산 법화원을 찾았다.

석도항은 산둥성 동쪽에 자리한 영성시에 속한 항구로 장보고가 활약한 당시에는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으로 불렸다. 즉 이 무렵 적산포는 장보고의 통제를 받아 신라·당·일본을 연결했던 국제무역항이자 당나라에 자리한 장보고의 대표적인 근거지였던 곳이다.

법화원은 당시 산둥에 가장 큰 사찰로, 재당신라인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곳이자 장보고 선단과 나당 간 왕래 사절단의 번영과 안전을 기원하는 신앙기도도량이었다. 일본 천태종 3대 좌주인 엔닌에 의하면 당나라에 구법하고서 귀국하려는 신라 승려는 물론 일본 승려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귀국한 뒤에도 적산법화원을 잊지 못해 일본 교토의 소야산에 적산의 이름으로 '적산선원'을 세웠다.

적산명신상 분수쇼 중에 불을 뿜는다
적산명신상분수쇼 중에 불을 뿜는다송진숙
법화원은 창건 연대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828년(흥덕왕 3년)이후에 건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때의 법화원에는 불당은 물론 2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강당, 승려 27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승방,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방 등과 장경각, 식당, 창고, 종루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말에 진행된 <법화경> 강경에는 200~250여 명의 남녀가 모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엔닌이 845년 적산법화원에 왔을 때는 844년 10월부터 시작된 당나라 무종의 사찰철폐령으로 인해 훼손된 상태였다.

한편 장보고가 활동하였던 당시 신라 사회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자연히 장보고는 혼란한 말세를 극복하고 선단의 안전한 항해와 활발한 무역활동을 꾀하기 위해서 관음신앙과 법화신앙을 부각하며 정토를 염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장보고 선단의 활동 영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명주 천주 등 남중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적산법화원은 동아시아 불교 교류의 장이자 동아시아 불교 발전의 성지였다고 할 수 있으며 장보고는 동아시아 불교 교류를 이끈 선구자였던 셈이다. 이로써 장보고 유적 답사는 끝났다.

답사를 끝내고 타고 왔던 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장보고의 유적을 당시로 거슬러가, 길진 않지만 5일 동안 그의 발자취를 추적해봤다. 그의 후예로서 우린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디쯤에 있는지...

오는 배안에서 생각했다. 지금의 한국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세계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반도는 대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마치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곳이다. 시각을 바꾸어 우리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고 가슴을 펴고 자신감을 가지고 교단에 서서 미래의 주인공인 우리의 제자들에게 얘기해야겠다. 힘차게 내딛으라고... 앞으로의 싸움은 육지에서가 아닌 해상이라고. 역사적으로 해양을 장악했던 나라들이  번성했노라고. 바다를 향해 우리의 도약을 향해 바다에 관심을 갖고 꿈을 키우라고.

덧붙이는 글 | 2012.8.15-8.20 장보고 유적 답사팀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2012.8.15-8.20 장보고 유적 답사팀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산둥성 #장보고 #적산법화원 #적산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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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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