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의 순국을 기리는 기념물. 서울시 종로구 공평동에 있다.
김종성
서울 조계사에서 인사동 쪽으로 가는 인사동5길을 걷다 보면, 구한말의 애국자를 기리는 역사유적이 나온다. 1905년 을사늑약(소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반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영환의 순국정신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이 민영환과 고종 임금이 얽힌 이야기가 구한말의 정치 비화록인 황현의 <매천야록>에 소개되어 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민씨 외척세력의 일원인 민영환은 고종과 자주 만남을 가졌다. 민영환(1861년 생)은 고종(1852년 생)보다 9살 연하였다. 지위로 보나 나이로 보나 고종이 민영환보다 세상을 훨씬 더 잘 알았다. '고종이 세상을 훨씬 더 잘 알았다'는 표현을 기억해두자.
민영환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고종에게 장인인 서상욱을 군수에 임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고종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느 날 한 번은 "장인이 아직도 군수가 되지 못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을 뿐이다.
하도 반응이 없자, 민영환은 기회를 보아 또다시 청탁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고종은 "내가 잊어버릴 뻔했군요. 곧 이름을 적어서 내리겠습니다"라며 전라도 광양군수 자리를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이때가 1901년 5월 초순이었다. 민영환이 마흔한 살 때였다.
민영환은 무척 기뻐했다. 임금이 자신을 믿고 인사 발령을 내려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집에 돌아온 민영환은 어머니에게 "오늘 황상께서 장인에게 군수 자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동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당시는 대한제국 시대였으므로 주상 대신 황상이란 표현이 쓰였다. 민영환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렇게 어리석으니, 어찌 황제의 외척이라 할 수 있겠느냐? 황상께서 어찌 자리를 제수하면서 너한테만 후하게 대했겠느냐? 내가 이미 5만 원을 상납했느니라."민영환의 어머니가 이미 뇌물을 상납했는데도, 고종은 깜빡 잊고 인사발령을 내리지 않았던 셈이다. 당시 고종은 돈을 받고 관직을 파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이 많았기 때문에, 돈을 받고도 깜빡하고 있었던 것.
"내가 이미 5만 원을 상납했느니라" 구한말의 화폐 개혁으로 인해 1901~1905년에는 화폐 단위로 원·량·민 등이 혼용되었다. <매천야록>에도 여러 가지 단위가 뒤섞여 있지만, 그냥 원으로 통일해서 이해해도 무방하다. 당시 관찰사 자리는 10~20만원이고, A급 지역의 군수 자리는 5만 원 이상이었다. A급 지역은 세금이 많이 걷히는 곳을 의미한다. 광양군수 자리가 5만원에 팔린 것을 보면, 당시 광양군의 재정수입이 괜찮았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1905년 당시 황성신문 논설위원의 월급은 30~40원, 1908년 현재 목수의 일당은 82전이었다. 목수가 30일 내내 근무할 경우에 한 달 수입은 24.6원이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면, 1905년이나 1908년에는 관직 가격이 좀더 올랐을 수도 있겠지만, 1901년의 관직 가격이 1905년이나 1908년에도 그래도 유지되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30원을 버는 논설위원이 5만 원짜리 군수가 되기 위해서는 139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오로지 글만 써야 했고, 24.6원을 버는 목수가 5만 원짜리 군수가 되려면 169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대패만 밀어야 했다. 이런 점을 비춰보면 고종이 받은 5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