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련씨가 3살때 고아원에서 찍은 사진
최미련
최미련씨는 1970년 6월 16일 전북 익산 출생으로 추정된다. 기자는 최미련씨를 지난 13일 '뿌리의집'에서 만났다. 기록에 의하면 생후 약 두 달 후인 1970년 8월 6일 김남배라는 여성이 그녀를 익산농고 앞에서 발견해 그해 11월 12일까지 돌봐주었다. 그 후 미련씨는 이리 기독영아원에서 지내다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5살 때인 1975년 6월 27일 미국 위스콘신주 알바니로 입양 보내졌다.
미련씨는 몸에 병이 있어서 5살이 되도록 입양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당시 미련씨 의료기록을 보면 기관지염이 있었고 독감을 종종 앓았으며 심한 중이염으로 고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결국 심한 중이염으로 그녀는 왼쪽 귀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또 고아원에 입소 당시 그녀는 심한 눈병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외에도 오른쪽 팔이 부어올라 수술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미련씨는 자기 몸이 쇠약하고 아픈 곳이 많아서 친부모가 생활고로 양육을 포기한 것이 아닌지 추정한다.
최미련씨가 5살부터 20살까지 15년 동안 살던 미국 위스콘신주 한 카운티에서 아시아 사람은 그녀 혼자였다. 입양가족도 그녀가 백인이 아니고 아시아인 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시켰다. 미련씨가 15년이나 살던 위스콘신주 한 카운티에서 아무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백인 행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주위 백인들이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 황인이라는 점을 지적해 줄 때 왠지 슬프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살던 동네 백인들이 아는 황인은 중국인과 베트남인밖에 없었다.
"엄마 말 안 들으면 빈곤한 한국으로 돌려보낼 거야!"최미련씨가 살던 마을에 많은 젊은이 들이 베트남전에 전사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베트남인을 싫어했고 미련씨도 베트남인으로 취급했다. 백인 마을에 혼자 아시아 소녀로 자라면서 동네아이들은 그녀 피부색이 어둡다, 눈이 작다, 코가 납작하다고 놀려댔다. 더 어려웠던 것은 백인입양 엄마도 "어떻게 그런 작은 코로 숨을 쉴 수 있니?"하고 놀려댈 땐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입양엄마는 미련씨에게 "엄마 말 안 들으면 빈곤한 나라 한국으로 돌려보낼 거야!"라고 야단을 쳤다.
고등학교때 미련씨 생활은 가장 비참했다. 하나뿐인 동양 여성과 데이트를 신청하는 백인 남성은 마을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결국 모든 것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었다.
입양부모는 미련씨보다 다섯 살 연상의 아들과 한 살 어린 아들이 있었다. 입양부모와 백인오빠와의 관계는 항상 불편했고 긴장의 연속이었다. 특별이 양어머니와의 관계가 가장 나빴다. 양부모는 미련씨의 모국인 한국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미련씨가 커가면서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홀트에서 미련씨 양부모에게 입양 전 심리검사를 하던 중 양어머니는 아동 입양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이 나왔다. 그리고 결국 2번의 입양시도가 실패 한 후 3번째 입양시도에서 양어머니는 입양부모를 위한 심리검사를 통과했다. 그리고 입양한 것이 바로 최미련씨였다. 그래서 그런지 양어머니는 미련씨를 야단칠 때 마다 항상 "너는 내 3번째 선택이었어. 알겠니?"라며 소리쳤다.
"불행하게도 양어머니는 기분이 안 좋으실 때 마다 제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저를 마치 펀칭백처럼 때렸어요"라고 담담히 말하는 미련씨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숱한 양어머니의 폭행으로 미련씨 몸에는 지금도 흉터가 남아있다. 성인이 된 지금 미련씨는 양어머니가 당시 어떤 욕구불만이나 정신질환이 있어서 자신을 그렇게 학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를 입양하는 것은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고 가격도 쌌어!"미련씨 입양부모는 이미 아들 둘이 있었기 때문에 딸로서 미련씨를 입양했다. 미련씨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어린 시절 양어머니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때였다.
"나는 원래 파란 눈을 가진 백인 금발 여자아이를 입양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입양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 그런데 너를 입양하는 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고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지. 가격도 쌌어. 그래서 그냥 너를 입양했어." 미련씨는 양어머니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귀에 목이 박히게 들으며 자랐고 백인이 아니고 파란 눈이 아닌 자기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입양가족의 집은 조용할 날이 없었어요. 집에는 항상 큰소리와 큰 주먹이 날아다녔어요. 전 겁에 질려 구석에 앉아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요"라고 말하는 미련씨 표정은 너무 우울해 보였다.
30세가 되던 지난 2000년 미련씨는 마침내 양부모과 아예 결별했다. 미련씨는 1999년, 2001년, 2003년 각각 친부모나 자기를 발견한 김남배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해 익산농고 근교의 마을을 찾았으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녀는 익산농고 부근 경찰서를 방문하여 김남배씨를 수소문 했으나 담당 경찰은 그 이름이 가짜 같다고 답변했다. 다급한 마음에 미련씨는 1970년 그 익산 부근에서 아이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지 경찰서에 문의했으나 그런 기록은 7년만 보관되고 폐기되어서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통역과 함께 미련씨는 익산농고 근처 노인정을 찾아가 1970년 출생한 아이와 버려진 아이 그리고 김남배라는 여성에 대해 마을 노인들에게 문의했다. 그러나 노인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질문이 너무 많다며 미련씨와 통역에게 "가!"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미련씨는 친부모에 대해 아무 정보도 못 얻고 실망해서 돌아왔다. 미련씨는 지금도 왜 그 노인들이 그렇게 자신을 냉정하게 대했는지 이해 할 수 없다. 불행히도 미련씨가 친부모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을에 포스터를 붙이는 것이 불법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