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림과 장도영이 졸업한 군사영어학교의 당시 모습. 이 학교는 미 군정청이 통역요원과 임시 장교양성 목적으로 세운 것으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현재는 감리교신학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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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근처에 있던 만주군 보병8단에서 해방을 맞은 박정희는 북경으로 나와 그곳에서 김학규 지대장이 지휘하던 광복군 3지대에 잠시 몸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박정희를 '광복군 출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는 이미 해방이 된 뒤였으며, 또 이 부대는 '해방 후 광복군'이어서 항일운동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귀국 후 고향(경북 구미)에서 4개월여 소일하던 그는 매형이 농토를 처분해 마련해준 여비로 서울로 올라와 사관학교로 들어갔습니다.
세 사람 가운데 나이는 박정희(1917년생)-이한림(1921년생)-장도영(1923년생) 순이었으나 한국군에서의 계급은 그 반대였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전후를 기준으로 볼 때 장도영은 육군 정보국장을 마치고 그해 10월 9사단장, 6사단장을 거쳐 1952년 7월 육군 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한림은 장도영보다는 진급이 늦었는데 1948년부터 1년간 한국군 최초의 도미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1950년 7월 한 달여 2사단장으로 역임한 후 대구지구 사령관, 육본 정보국장, 국방부 정훈국장 등을 거쳐 1953년 2월 9사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박정희는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 후 좌익에 연루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 장도영, 백선엽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는데 전쟁 발발 후 육군 소령으로 복직하였습니다. 박정희는 근혜가 태어난(1952년) 그 이듬해 11월 준장으로 진급해 비로소 별을 달았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난 때는 1961년 5.16이었습니다. 5.16 당시 세 사람의 보직과 계급을 살펴보면, 먼저 박정희는 대구 2군사령부 부사령관(육군 소장), 이한림은 제1군사령관(육군 중장),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육군 중장)이었습니다. 당시 장도영과 이한림은 육군의 주요 지휘관이었으나 박정희는 한직이었는데 거기엔 그럴만한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1957년 육군대학 졸업 후 좌익전력으로 인해 어렵게 소장으로 진급한 박정희는 7사단장(57년), 6관구사령관(59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60년)을 역임했습니다.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한 후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는데 일본육사 선배인 이종찬 장군이 장면 총리를 찾아가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장 총리는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과 이 건을 상의하였는데 매그루더는 육본으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당시 김형일 육본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박정희는 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좌천)되었습니다.
5.16쿠데타 직후 <5.16 군사혁명사> 편찬 실무 간사였던 이낙선(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비서관, 전 상공부장관)이 채록한 증언자료에 따르면, 박정희가 쿠데타를 구상한 최초의 시기는 1960년 1월, 즉 그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해 1월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1기 선배인 김동하 해병대 소장(포항 주둔 해병 제1상륙 사단장)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민심 수습'을 논의하였으며, 2월에는 동래 온천장 별관 등에서 이주일 소장(당시 2군사령부 참모장) 등과 처음으로 '혁명'을 모의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병력은 김동하가 해병사단(포항)을, 이주일이 2군사령부 산하 각 부대를, 홍종철 대령(6군단 작전참모)이 33고사포 대대(인천)를 동원해 부산과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 거사일을 1960년 5월 8일로 잡았습니다. 이날은 참모총장 송요찬이 방미하기로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거사 한 달가량 앞서 4월 19일 학생혁명(4.19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4.19 일주일 뒤인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한 지 며칠 뒤 박정희는 대구사범 동기생이자 당시 <부산일보> 주필로 있던 황용주를 만난 자리에서 "아이고, 학생놈들 때문에 다 글렀다!"며 1차 거사 실패를 애통해 했습니다.
할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던 이들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2차 거사를 도모하였는데 거사일은 1961년 4월 19일로 잡았습니다. 이날은 '4.19혁명' 1주년이 되는 날로 이를 기념해 전국에서 대규모 집회가 발생하면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동원해 정부를 전복시킬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예상과 달리 당일 별다른 집회 없이 조용히 넘어갔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