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종기와 사투를 벌이다> 겉표지
시대의 창
실록의 '정조 24년'은 정조가 죽은 1800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조는 실록 속 날짜 그 며칠 뒤인 6월 28일에 죽는다. 즉위 초부터 걸핏하면 발생했던 종기가 그해 여름에도 생겼고, 종기가 발생한 지 24일 만에 죽고 만 것이다.
정조는 의학에 상당한 지식과 식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의(유학자로 의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인지라 종기가 발생하면 자신의 증상을 신하들에게 말하고, 어떤 약을 처방하는 것이 좋을지 토론했다고 한다. 그해 여름, 종기가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800년 여름, 정조는 고통스러운 종기와 싸우는 한편, 일련의 신하들과 팽팽하게 대립한다. 어느 해 여름에 인삼 5푼이 들어간 육화탕 3첩을 먹고 겪은 부작용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은 인삼과 맞지 않으니 인삼이 들어간 약은 처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극구 반대한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끊임없이 인삼이 들어간 약들을 추천했다. 결국 정조는 인삼이 들어간 '경옥고'를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 뒤 신하들은 더욱 많은 인삼 성분이 들어간 '팔물탕'과 '가감내탁산'을 정조에게 먹였고, 그는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만다.
"경들은 의술에 밝은 자를 두루 찾아 반드시 오늘 안으로 당장 내 병에 차도가 있게 하라. 나의 병세가 이러하여 백성과 나라의 일을 전혀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나, 일마다 관심이 있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아 이따금 꿈을 꾸기도 한다."(정조 실록 24년 6월 23일)"이러한 와중에 국사를 처결하기가 어렵지만 호남 수령들에 대한 포폄(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함)의 장계는 당장 뜯어보지 않을 수 없으니, 당직 승지로 하여금 와서 기다리게 하라"(정조 실록 24년 6월 23일)
정조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이끈 종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이 아프기 때문에 백성들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함을 지극히 미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꿈속까지 나타났을까 싶다.
정조의 죽음 뒤 조선에 일어난 만신창이와 같은 역사를 배운 후세인으로서 '정조가 10년 만 더 살았더라면 우리의 조선 후기 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조선 역사를 뒤흔든 종기<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는 종기를 통해 만나는 조선의 역사 그 한 부분을 담고 있다. 저자 방성혜는 한의사로 환자들을 돌보는 한편, 한의학 관련 논문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면서 우리 한의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의학자다. 그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종기를 둘러싼 조선의 치열한 질병사를 들려준다.
내가 어렸을 때(1970년대)만 해도 종기를 치료하는 고약은 가정 상비약일 정도로 흔했다. 종기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약을 붙여 독소를 빼내고 나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새살이 돋을 정도로 쉽게 나았다. 물론 모든 종기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종기는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는 동전만한 고약으로 어느 정도는 다스릴 수 있었던 병이라 걸핏하면 종기로 고생하다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정조가 죽었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 <조선, 종기와 사투를 벌이다>에 따르면 조선의 27대 임금 중 12명이 종기를 앓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종기 때문에 고생한 임금이 있는가 하면 종기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사망에까지 이른 임금들도 여럿이다.
종기로 고생하는 동안 임금은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고 한다. 또, 종기로 임금이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 왕위 계승의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왕세자에게 왕좌가 넘어가 정치적 혼란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문종(제5대)의 죽음 후 세조(제7대)가 일으킨 피바람이다.
문종은 병약한 임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책은 문종이 등창에 걸린 세종 31년까지 병에 걸렸다는 어떤 기록도 없음을 근거로 '원래는 건강했지만 등창, 즉 등의 종기 때문에 건강이 쇠락해 죽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종기가 우리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어의, 임금의 종기를 치료하지 못해 죽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