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산행길, 주변 풍광을 즐기는 아이들이때까지만 해도 여유가 있었다.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을 지날 때면 서로 감상을 나누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서부원
무슨 일이든 시작은 즐거운 법. '파이팅'을 외치는 스물한 명 아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이 정도쯤이야'라는 표정이다. 등산화에 배낭과 모자, 등산용 스틱까지 갖춘 모양새가 흡사 지리산을 족히 대여섯 번쯤 완주한 이들 같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돌아갔고, 이틀간 30킬로미터가 넘는 산길을 어쨌든 견뎌내야 한다.
노고단 오르는 가파른 고갯길에 잠시 헉헉대긴 했어도 임걸령에 이르는 동안은 능선길이 비교적 완만해서인지 서로 대화를 나누고 귀에 꽂은 MP3 플레이어 속 노랫소리를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간단한 게임을 하며 걷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능선에서 반야봉에 오르는 갈림길인 노루목에서부터 아이들의 입은 굳게 닫혀버렸다. 말하기조차 힘들었던 거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종주의 시작이다.
뱀사골계곡이 시작되는 화개재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부터는 아이들의 '본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기 배낭이 더 무겁다고, 등산용 스틱이 없어 무릎이 아프다고, 심지어 날씨가 덥고 산에 식수를 보충할 곳이 부족하다는 등 딱히 해결해줄 수 없는 내용의 불평과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작 가도 가도 끝없는 가파른 오르막 때문이다.
물보다 소금을 찾는 아이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급기야는 배낭을 아이들끼리 나눠 매는 일이 속출했다. 채 10분도 못 걷고 털썩 주저앉을 만큼 가다 쉬다 하기 일쑤고, 연신 대피소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묻고 또 묻는 아이들. 씻을 곳이 마땅치 않으니 선크림을 바르지 말라고 사전에 그토록 강조했건만, 흐르는 땀에 선크림이 눈에 들어가 쓰라리다는 아이까지... 한마디로 '아우성'이었다.
산에 오르면서 '거의 다 왔다'는 얘기는 더 이상 거짓말도 아니다. 물어보는 이나 대답하는 이나 그저 '힘내라'는 뜻이라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가파른 토끼봉을 넘어선 후부터는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앞사람 발뒤꿈치만 따라 걸을 뿐, 힘들다는 푸념조차 들을 수 없었다.
1학년 한두 아이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워졌다. 얼굴은 물론, 머리카락 전체가 흡사 물폭탄이라도 맞은 듯 땀으로 흥건했다.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탓이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보니 대피소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적잖이 걱정됐다. 자주 쉬게 하고, 챙겨온 죽염을 건네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두워지면 위험해!"... 귀담아듣는 아이는 없었다시간이 가뭇없이 지체됐다. 아침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예상대로라면 오후 4시 남짓에 숙소인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그 시간 모두가 파김치가 된 채 가까스로 연하천 대피소에 다다랐다. 3.5킬로미터를 더 가야 하는데, 배낭을 내팽개치고 등산화 끈을 풀어버린 모습을 보아 이미 절반 가까이는 체력도 의지도 모두 소진된 모양새였다.
산에선 해가 빨리 지고 어두워지면 산행이 위험하다고 연신 다그쳤지만, 귀담아듣는 아이들은 없었다. 되레 더 이상 못 걷겠다면서 이곳 대피소에서 1박을 하자고 떼쓰듯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리가 풀린 친구들을 위해 여태껏 짐을 나눠 든 아이들조차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차라리 2박 3일의 일정으로 계획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드는 순간이었다.
서둘러 걸어도 족히 한 시간 반은 더 가야 한다. 아이들의 몸 상태로 보아 여기서부터는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버텨내야 하는 구간이다. 아닌 게 아니라, 너덜지대가 많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리 험한 곳이 아닌데도, 아이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가장 힘들었던 구간으로 손꼽았다. 오후 6시를 넘겨서야 천신만고 끝에 벽소령에 닿았다. 주위는 이미 어둑해졌다.
모두가 허기져 했지만 누구 하나 취사 준비에 나서지 않았다. 배고픈 것보다 당장 드러눕고 싶을 만큼 피곤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중 대피소라는 곳이 낯설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입장에서야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멀뚱거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기 손으로 밥을 지어본 적이 없다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버너에 가스를 끼울 줄 몰라 헤매고, '왜 대피소에는 수도꼭지와 쓰레기통이 없냐'며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다. 개별적으로 준비한 밑반찬이 하나 같이 햄과 소시지뿐이고, 숫제 세 끼 모두 라면만 끓여 먹을 요량인지 배낭 속엔 그런 것들만 그득하다.
벽소령을 휘감은 구름 속에서 저녁식사를 마치니 이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채 아홉 시도 안 됐는데 곳곳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학기 중이라면 잠자기는커녕 야간자율학습도 끝나지 않은 '초저녁'인데, 산중에서는 이미 '삼경'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오늘 하루 이곳까지 걸어온 게 기적이라며 스스로 대견해하는 수군거림을 들으며 이내 잠이 들었다.
둘째 날, 벽소령에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