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방사 주변 풍광이 좋은 절이다
김수종
조사는 부모가 크게 걱정을 할 것이라 여겨 처녀를 계림으로 데려갔다. 유석은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이 돌아오자 매우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 딸을 데리고 살아 달라고 하였다. 조사가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렇다면 몇 달간만이라도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였다.
차마 그 부탁까지 거절하지 못한 조사는 유석의 집에 머물다 몇 개월이 지난 뒤에 수도하던 곳으로 돌아왔는데, 초막은 단청이 잘 된 법당으로 변해 있었다. 유석이 은혜를 갚고자 조사가 자기 집에 머무는 몇 개월 동안 법당을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희방사'라 칭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의 오른쪽에는 '소백산 희방사'의 오래된 현판을 걸고 있는 요사채가 세로로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역시 새로 지은 건물인 '희방쉼터'가 있다. 왼쪽으로 계곡의 다리를 건너면 지장전과 종각이 보인다. 삼성각을 내려와 지장전으로 향한다.
계곡 건너에 있는 지장전으로 가기 위한 다리 앞에는 다리 건너 오른쪽이 연화봉과 천문대, 비로봉으로 가는 등산로임을 가르쳐주는 표지판과 식수를 여기서 준비하라는 안내의 마지막 음수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두운조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지장전은 다리의 바로 정면에서 석탑과 한 쌍의 석등을 대동하고 있으며, 희방사란 이름이 선연한 범종은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희방사는 또한 <월인석보>를 소장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부왕인 세종대왕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원래는 1568년(선조1)에 새긴 <월인석보> 1, 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법당과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월인석보> 책판만을 보존하고 있다.
불경언해서로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국보급 문화재들을 안타까워 하다가, 경내에서 희방사의 설송 주지스님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