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신단 금성대군신단 문
김수종
순흥부사였던 이보흠을 선두로 고을의 군사와 향리를 모았고, 영남지방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거사를 감행하기도 전에 밀고로 발각되면서 금성대군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금성대군과 이보흠, 그리고 수많은 영남 선비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 역모에 동참한 혐의로 가문이 멸족당하는 등 수천 명이 죽계천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죽계천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도 안정면 동촌리에 '피끝'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마을이 있어 그날의 피비린내를 짐작하게 한다. 이때 등장하는 무대가 '청다리'이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멸족의 위기를 모면코자 부모들이 외부의 눈을 피해 피신시킨 아이들이 다리 밑으로 모여든 것이다.
결국 고아들의 집성촌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하면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란 말이 생겨났단다. 이런 씁쓸한 어원도 모르고 낄낄대기만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단종 복위를 둘러싼 비극적인 사건으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되었고,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큰 고을 중 하나였던 순흥은 졸지에 역모의 땅이 되어버렸다. 순흥도호부 처마만 따라가면 10여 리는 비를 맞지 않았을 정도였다던 집들도 불바다로 변하여 인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