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자료사진)
남소연
한일군사정보협정 파문으로 지난 5일 사표를 낸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교수 시절 친일성향이 농후한 논문을 여럿 써 물의를 빚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후 한 트위터리안은(@saladm***)은 자신의 트위터에 "뼛속까지 친미, 핏속까지 친일이 확인된 셈"이라고 올렸습니다. '뼛속'이 이명박 대통령을 두고 한 말이라면, '핏속'은 아마 김 기획관을 두고 한 말일 겝니다. 오싹하다 못해 섬뜩하기조차 합니다.
한일군사정보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하려다 들통이 나 나라 안팎에 파문을 일으킨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은 미국에서 석-박사를 딴 '미국파'이면서 일본과도 인연이 없지 않습니다.
그는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를 지냈으며, 2009년엔 제5회 '나카소네상(賞)'을 수상한 바도 있습니다. 이 상은 40세 전후의 차세대 지도자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김 비서관은 '동아시아 안보에 관한 연구와 한-미-일 관계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했다고 합니다.
항간에서 한일군사정보협정을 '매국협정'으로, 김태효 전 기획관을 '친일파'로 지칭하는 데는 그가 쓴 일본 자위대 관련 논문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일 자 언론에는 그가 2001년, 2006년 한국전략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지 <전략연구>에 실은 논문 두 편이 공개돼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들 논문에서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개입을 공공연히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김태효, 한일 간 과거사 도외시한 채 자위대 '교전권' 운운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우선 신아세아연구소 외교안보연구실장 시절에 쓴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역할 : 미·일 신방위협력 지침을 중심으로' 라는 논문에서 김 기획관은 "일본이 한반도 유사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로 되는 것은 평상시 대북 억지력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쟁 상대국은 종전 2개국(한·미)에서 3개국(한·미·일)으로 확대되는 꼴이 되며,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의도를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억제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의 개입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이어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시절에 쓴 '한일관계 민주동맹으로 거듭나기'라는 논문에서도 "자위대가 주권국가로서의 교전권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대단히 편협하다"고 주장하고는 "과거사 문제는 한일 안보협력 관계를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는 데 제약요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양국 간 기본적으로 추진해야 할 협력의 당위성을 해치는 파괴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한일 간의 과거사는 도외시한 채 자위대의 '교전권' 운운하고 있는 그의 국적은 대체 어디일까요?
김 기획관의 논문 두 편이 언론이 소개돼 논란이 된 날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6·25 때 이승만조차도 '일본군이 개입한다면 먼저 일본군을 축출하고 그 다음에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고 했다"며 "농민군과 의병, 독립군이 피로 써내려간 '피의 역사'를 모르는 자는 이 나라의 안보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썼습니다. 그는 또 "일본군을 한국에 들일 게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자를 일본에 보내야 할 것"이라며 "그들(자위대)을 '한반도 유사사태'에 개입시키자는 한국인도, 한국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씨는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개입을 주장한 김 기획관을 두고 '한국인이라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지나친 표현일까요? 제 나라 제 땅에 외세를 불러들이는 행위라면 이건 한국인이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구한말 조선의 주권을 일본에 건네주고 그 결과 이 땅에 일본을 불러들인 매국노들과 진배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친일파'라고 부르는데 김 기획관 같은 사람을 '신판 친일파'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현실론을 펴면서 외세를 불러들였고, 그러고는 '뼛속까지', '핏속까지' 외세의 주구노릇을 하였지요.
중국 침략과 큰 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조선인들을 황군(皇軍)으로 만들어 전쟁터에 내보낼 요량으로 조선인의 일본인화(化)를 시도했습니다. 미나미(南) 총독은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등을 추진하였으며, 급기야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습니다. 흔히 굳은 맹세를 할 때 '내 성(姓)을 갈겠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들은 가문과 성씨를 목숨처럼 중시해왔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이 시행되자 실지로 목숨을 내던진 사람도 있습니다.
전남 곡성의 류건영(柳健永)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엄중한 서한을 보낸 후 자결하였습니다. 또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아이가 학교에서 창씨개명을 해오라는 얘기를 듣고 아이에게 창씨개명을 해준 후 돌을 안고 마당의 우물로 뛰어들었습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선전해댄 자가 있었으니 그는 우리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춘원 이광수였습니다. 춘원은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후 이렇게 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