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과 오연호 대표가 공동 집필한 대담집 <새로운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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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100년>을 단숨에 읽고 가방에 넣어 들고 다녔다. 마치 복음과도 같았다.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얻기까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늘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우위를 선점하라고만 배웠던, 인정하기 싫은 현실 속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늘 가슴 조이고 애쓰면서 젊은 날의 꿈은 저만치 밀어놓고 있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서른이 넘어 시작한 배낭여행은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그즈음 필독한 책이 <성경>과 시오노 나나미의 16권짜리 <로마인 이야기>였다. <성경>을 읽고 중동의 성지를 순례하고,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유럽을 두 번이나 방문하고 나서 '우리는 뭐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어찌 되는 것이지?'라는 결핍감을 느꼈다.
2008년 서울 광화문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가 연일 열리고 있었다. 그 집회에서 오랜만에 대학 때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법륜 스님이라는 분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때 법륜 스님은 대북식량지원을 위해 단식을 70일간 하고 계셨는데, 세상은 무심했다. 나도 무심했다.
그해 여름 결혼 전에 여행이라도 실컷 다녀볼 심산으로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에 따라나섰다. 고등학교 때 배운 발해는 한 페이지의 반 정도밖에 기술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지도상으로는 신라보다도 더 컸다. 그때의 궁금증이 기행에 참가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고구려의 웅장함과 발해의 기상에 맘이 흐뭇하기보다, 두만강 너머 민둥산이 각인되었으며,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따라붙었던 중국공안들이 기행이 끝나는 날 공항까지 성가시게(?) 따라붙었던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또한 알게 되었다. 1995년부터 지금껏 북한의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서 300만 이상이 굶어죽었으며, 지금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 좋아 300만 이상이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내 고향 부산만한 도시 인구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이다.
모르는 것도 죄라고 했다. 그동안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까, 괜찮은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이렇게 모를 수가 있지?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임신하고 낳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와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은 곳에서 아프리카보다 더한 기아가 계속되고 있었다. 기아로 인해 중학생 아이의 키가 남한의 저학년 초등생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장애가 속출하며,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이 죽고, 간단한 약이 없어서 죽은 일이, 바로 비행기를 20시간 이상 타고 가야 하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1시간 거리인 북한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탈북자가 2만 명을 넘어선 지금 아직도 '모른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맘이 아팠다.
어미가 되니 아이의 기침소리 하나에도 민감하고, 밥 한 숟갈 더 못 먹이려고 안달하고, 내 자식에게는 유기농만 고집하고, 최신 영어 CD를 들려주며, 빵빵한 보험 제대로 들어줘야지 하는 맘이 든다. 그런데 만약 내 새끼에게 먹일 것 없고, 아픈데 약이 없어 치료를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게 된다면, 그 상황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동족이라고 하는 북한에서 그러고 있다면, 뭔가 문제가 단단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현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정치사회 문제를 떠나서 내 양심에 걸리는 일이 되었다.
우리 자식 세대를 위한 선택을 하자<새로운 100년>은 그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보여주는 해법서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통일이라는 단어에 걸려 있는 많은 복잡다단한 문제를 생각하면 머리부터 지끈거릴 수 있다. 그러나 법륜스님은 명쾌하게 <새로운 100년>에서 정리해주셨다.
남북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통일에 대한 통합적인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로만 통일을 부를 것이 아니라, 나의 비전, 특히 내 자식에게, 유기농 음식, 영어 유치원, 근사한 보험보다 통일된 한반도에 살게 하는 가장 큰 선물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