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경기도 화성의 한 돼지농가. 생후 50일 된 돼지들이 우리에 갇혀있다.
김동환
6월 29일 오전, 지하철 1호선 오산역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경기도 화성시의 한 돼지농가. 입구에 설치된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긴 소독기와 양돈협회 명의로 쓰여진 '출입금지' 팻말 등 농장 곳곳에는 지난해 터졌던 구제역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축사 부근에 가니 돼지 똥냄새가 코를 찔렀다. 기자가 생후 50일 된 돼지들이 모여있는 축사 문을 열고 카메라를 들자 우리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수십 마리의 돼지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부딪히면서도 벽쪽으로 계속 뛰었다.
뭘 잘못했나 싶어 뒷걸음질치는 기자를 보고 농장주인 임정욱(가명)씨는 "돼지들이 낮선 냄새를 맡아 그렇다"며 신경쓰지 말라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임씨는 이곳 화성에서 29년째 돼지를 키우고 있는 축산인이다. 그간 '산전수전' 다 겪고 지난해에는 키우던 돼지의 3/4을 제 손으로 땅에 묻으면서도 하루 10시간씩 일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지만 올해는 근심이 각별하다. 예년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은 돼지고기 가격 때문이다.
정부의 무분별한 고기 수입... "FTA 관세 완전 철폐보다 더 심각해"양돈농가에게 4, 5, 6월은 1년 중 가장 행복하고도 중요한 시기다. 국내 양돈 특성상 시중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서 가격이 가장 높이 오르는 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올해 4, 5, 6월 돼지고기 도매가가 원가수준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임씨는 돼지 가격 얘기가 나오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지금 농가에서 자체 파악하기로는 지육(돼지에서 머리와 내장을 뺀 것) 1kg당 생산비가 4500원이야. 그런데 4, 5, 6월에 전매시장에서 거래가가 4500원을 넘은 게 며칠이 안 돼. 1000두씩 기르는 농가에서도 한 달에 1500~2000만 원 정도 손해를 본다고 그러더라고."4, 5, 6월이 양돈 농가의 '성수기'라면 9, 10, 11월은 '비수기'에 해당한다. 임씨는 "4, 5, 6월에 번 걸로 추석 이후에 돼지 가격 떨어지면 메우면서 살았는데 올해는 정말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왜 몇 년간 4월만 되면 오르던 돼지가격이 갑자기 오르지 않는 것일까? 기자가 지난해에 발효된 한-EU FTA 때문이냐고 묻자 임씨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그는 "지난해에 구제역 터지면서 정부에서 무관세로 돼지고기를 대량 수입했고 시중에 그 재고 고기가 한참 남아 가격이 오르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씨는 지금 FTA로 관세가 완전 철폐된 것보다 더 심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에 구제역때문에 돼지고기 값이 오르니까 정부에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비행기 운송료 대줘가며 고기를 무관세로 막 수입했어. FTA는 낫지. 그건 매년 관세가 조금씩 내려가는 거고 또 어느 정도 시장원리라는 게 작용하잖아. 국민 입장에서야 당장 돼지고기가 싸면 좋지. 근데 세상에 싸면서 좋을 수는 없는거야. 생산자들이 최소한 수익을 못 맞추면 관련 산업도 다 붕괴하는 건데…"
격앙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기자에게 "취재 시점을 잘 못 잡았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올 6월을 기점으로 가격이 더 내려갈 것이라는 게 그의 예상이다. 지난해 구제역 이후 돼지를 다시 키우던 농가들이 거의 구제역 이전까지 생산수준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공급이 더 오르면 "농민들이 9월에는 도매시장 기준으로 1kg당 3000원대 까지도 내려갈 걸로 보고 있다"고 임씨는 말했다.
FTA 정부 지원, 무허가 건물 있으면 못받아... '빛 좋은 개살구'정부에서는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한미, 한-EU FTA 발효를 앞두고 피해가 집중되는 농업 분야에 갖가지 지원을 약속했다. 발표된 계획 안에는 양돈산업과 관련해서도 축사시설 현대화사업과 농가별 질병 컨설팅 지원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정부는 2011년 1633억 원에 불과했던 축사시설 현대화 사업 자금을 올해는 4885억 원으로 크게 늘렸다. 보조와 융자를 함께 해주는 방식으로 2760억 원의 예산을, 보조 없이 융자만 해주는 방식으로 2125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축사시설을 현대화하면 생산성이 늘어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현장 농가에서는 이에 대해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오랫동안 축산을 해온 농가들은 실질적으로 지원받기가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이다. 임씨는 "FTA 이후 보조사업 다 줄고 대신 축사시설 현대화사업이 확대됐는데 우리같은 농민 입장에서는 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덧붙였다.
"지금 FTA 대책이라고 나온 게 축사시설 현대화사업 규모 늘리는 게 다야. 그런데 농장 안에 무허가 건물이 있으면 이 사업 신청 자체를 못해요. 내가 1800두 키우는데 나같이 축산만 하는 전업 농민들도 농장 안에 무허가 건물 20~30%씩은 다 갖고 있어. 신청 기준이 너무 엄격하니까 예산도 많이 남는다고 하더라고."